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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타죽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

더위를 쳐부수는 사람들

by 작은바이킹



채 퍼붓지 못한 장마가 아쉬웠는지, 햇볕이 아무래도 어디 맛 좀 보라며 좍좍 퍼붓는 느낌입니다.

오늘의 예보 기준 서울은 22년 만에 최고 온도라는 37도. 한 달쯤 이어지고 있는 이 '햇볕 장마'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볼 것도 없이 일찍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높아가는 불쾌지수에 행여 누구와 다툼이라도 날까 최대한 인상 쓱 쓰고 입 꾹 다문 채 지내는 수밖에요.


그런데,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더랍니다. 기상청이 숙제 미루듯 예보를 미루거나 말거나, 습기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뿌연 공기가 궁둥이를 붙이고 내려앉거나 말거나, 낮기온이 몇십 년 만에 최고로 치솟거나 말거나, 팔짱 딱 끼고 우리의 하루를 태연히 지키는, 진짜 '쎈' 사람들이요.







10:00 am


"아저씨!!! 이 버스 리우 가요?"


버스 승강장 지붕 아래 다닥다닥 붙어 선 모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버스가 오는 쪽만 째려보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마침 도착한 버스의 앞문을 턱 막아서며 물었습니다. 이 버스, 리우 가냐고요.

기사님은 내가 잘못 들은 걸까, 귀찮지만 일단 대답합니다. "안..안 가요..."

이 더위에 양복을 챙겨 입고 넥타이까지 맨 아저씨, 포기하지 않고 올림픽 정신으로 다시 묻습니다. 리우요, 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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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 승객들이 허헐허헛 웃는 소리가 뜨거운 햇볕을 뚫고 바깥까지 들립니다. "아, 안 간다고요!" 기사님의 짜증과 함께 버스는 부앙- 다시 출발. 정말 리우를 가고 싶었던 건지, 약간은 억울한 표정의 양복 아저씨. 미안하지만, 덕분에 승강장에 남은 사람들은 어느새 얼굴을 풀었습니다. 내내 스마트폰 어플을 눌러대던 손에 찬 땀을 닦고, 뻐근한 어깨도 좀 돌려봅니다. 리우행 버스가 지나간 자리, 한 줄기 시원한 웃음이 남았습니다.




01:00 pm


"목소리 그것밖에 안 나옵니까?! 더 크게! 태! 권! 도!!"


으으, 죽어도 저건 진짜 못하겠네요. 배에 힘을 빡! 주고 합! 하는 거라든가 양 다리를 쩍벌남처럼 벌리고 주춤~서! 하는 것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 이 나이에 제 입으로 태! 권! 도! 라니요. 어찌나 창피한지 오금이 다 저려옵니다.

뒤늦게 운동이란 걸 해보겠다며 내발로 찾아와서는, 발차기는커녕 기합 한 번 당당히 넣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토요일 낮에는 사람이 좀 적을 것 같아 슬쩍 찾아왔는데, 웬걸 이 삼복더위에 이렇게나 많은 '어른'들이 돌려차기를 해대고 있을 줄이야. 여러분, 안 더우세요?!


네이버 웹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중


가만 보니 한 사람도 성질난 얼굴이 없습니다. 스피커에선 최신 유행 힙합이 요요 예아 흘러나오고, 서로들 이름도 모르면서 악~! 소리를 지르며 함께 다리를 부여잡고 스트레칭을 합니다. 땀이야 줄줄 흐르거나 말거나, '뭐 여름은 더운 거지. 겨울은 추운 거고' 하는 듯한 태연한 몸짓입니다.


"아 우리 아들이, 자긴 빨간 띠라고 맨날 날 무시하잖아요"

'B E WHY 이게 유행이라매'를 배경음악 삼아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는 흰 띠 아버님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씨익 들어갑니다. 어쩐지 운동하러 와서까지 '잘하지 못할까 봐' 뻘쭘한 어른은 나밖에 없었네요. 나도 허위적 허위적 장권을 날려 가며 외쳐봅니다. 태! 권! 도!!!




03:15 pm


언니가 제일 아리따워요


어깨에 내리 꽂히는 햇볕을 견디다 못해 슬쩍 문 열린 화장품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아이고 시원해라.

막상 들어왔는데, 딱히 살 건 없어서 쭈삣거리다 매니큐어를 하나 집어 들었어요. '맞다, 지난번에 보니 재작년(..)에 산 하얀 매니큐어가 굳어 있었지. 근데 정말 이것만 사도 되나?'


올여름 전기세 대란에 문 열어놓고 영업하는 가게들도 문제지만, 무턱대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화장솜이 든 바구니를 쥐여 주고선 알아서 뭐든 사겠지, 하고 나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일단 바구니를 받긴 받았는데 마땅히 살 게 없어 다시 나오려는데, 도통 이 바구니를 어디다 놓고 나가야 할지(화장솜 먹튀를 할 순 없으니까요) 몰라 한참을 두 평 남짓한 가게 안을 종종거린 적도 있습니다. 정작 제게 이 부담을 준 언니들은 또 다른 고객에게 바구니를 쥐여 주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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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 이유로 더 살 게 없나 가게를 휘휘 둘러보았지만, '잠시 쐰 에어컨 값'으로 치르기엔 딱히 더 필요한 물건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은 죄송한 마음으로 하얀 매니큐어 한 개를 수줍게 계산대 위에 내려놓습니다. 저... 이것만 살게요.


"어머~ 고객님~! 이~쁜 색 고르셨네요 ^^"

어.. 하..하얀색이 이쁜 색이었던가요? 생글생글 계산대 언니는 작은 매니큐어 한 개를 정성스레 종이봉투에 챡 챡 담아 넣고는 멤버십 있으세요? 하고 또 생글생글 물어옵니다. 핸드폰 번호를 꾹꾹 입력하자, "우와, 마침 멤버십 할인 기간이라 50%나 할인받으셨어요! 천 칠백 오십 원만 주시면 되겠네요^^" 하며 나보다 더 좋아합니다.

매니큐어 하나 담기엔 조금 큰 종이봉투를 고맙게 받아 들고 나서려는데, "밖에 진~짜 덥죠? 여기, 받으세요!"하며 두 손으로 짜잔, 내민 것은 바로 부채. "마침 필요하셨죠!" 하며 또 한 번 생긋 웃어주는 언니. 아, 내 심장의 마지노선은 무너지고 맙니다.


천 칠백 오십 원짜리 매니큐어 한 개, 50%나 할인해서, 그것도 카드로 샀는데 마치 천 칠백 오십 개의 화장품을 산 손님처럼 대해주던 신촌 '아리따운 화장품 가게' 언니. 정말로 이 가게 매니큐어 다 사주고 싶은 맘을 꾹꾹 참느라 혼났다니까요.




05:30 pm


할아버지, 여기가 시원해요!


2호선 합정역, 노란색 빵떡모자 쓴 꼬맹이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지하철에 탔습니다.

남아 있는 자리는 다행히 딱 두 개, 하지만 따로따로 네요. 하나는 내 옆자리, 다른 하나는 그 맞은편.

어쩔 수 없이 남북 분단이 된 할아버지와 꼬맹이. 행여 옆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손나팔을 만들어 조심조심 대화를 합니다.

"(소곤소곤) 배 안 고파? 두유 먹을래? 그 가방에 들어 있어" - 할아버지.

"(소곤소곤) 아니에요, 괜찮아요! 뚜껑이 없는 거라서 지금 따면 다 먹어야 해요" - 꼬맹이.

이야, 너 참 착하구나! 병아리 옷차림을 보아 초등학생은 아직 아닌 거 같고, 일곱 살쯤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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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칭얼거릴 나이에 꼬박꼬박 존댓말을, 그것도 소근소근 예의 바르게 말하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자리를 바꿔 주었습니다. 꼬마야, 이쪽으로 와. 내가 그쪽에 앉을게.

그러자 지금까지 소근거리던 그 병아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인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옆자리인데 뭐 그리 차이가 난다고 자기 무릎을 팡 팡 때리며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이 시원해요!" 하며 그제서야 빵끗 웃는 꼬맹이. 연신 저를 보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합니다.

아이고야, 누나(이모?)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닌데!




07:40 pm


사장님의 러브레터


피자를 시켜놓고 이렇게 두근거릴 수 있다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라도 되나요? 아님 배달하시는 분이 엄청나게 훈훈하거나?

최소 주문 금액 13,900원을 따악 맞춰 시켜도 자취생에겐 사실 피자 한 판은 부담스럽습니다.(물론, 1인 1판 혹은 1인 1닭 능력자분들은 예외입니다) 그래도 어떡해요, 먹고 싶을 땐 먹어야죠.

그럴 때 제가 늘 주문하는 동네 피자 가게가 있습니다. TV에 나오는 피자집만큼 토핑이 화려하지도, 도우가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그 어떤 피자보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피자를 파는 곳. 그 가게는, 사장님이 손편지를 써 주시거든요.


06.jpeg 실제 사장님이 손수 적어 보내신 메모.


혼자서 피자 한 판을 받아 드는 그 순간은, 사실 이미 혼밥 혼술에 익숙해진 자취생이라 할지라도 약간은 샐쭉해지기 마련입니다. 왜냐면 피자니까요. 피자는, 조각조각 나뉜 피자는, 함께 먹는 음식이니까요.

하지만 이 피자만큼은 예외입니다. 손바닥만 한 피자를 한 손에 들고서 직접 똑똑, 문을 두드리시는 나이 지긋하신 사장님. 늘 공손히 맛있게 드세요, 인사도 잊지 않으십니다. 배달하시는 모든 피자에 손수 적어 주시는 사장님의 러브레터 덕분에, 에어컨 시원한 자취방에서 TV를 틀어놓고 혼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먹는 피자가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오늘 이거 내가 다 먹을 거예요. 다~ 내 꺼.


스크린샷 2016-08-23 오후 4.01.50.png 처음 배달 받은 날의 러브레터.





더위를 쳐부수는 사람들


이 모든 일들이 진짜 하루에 다 일어났다면, 얼마나 멋진 하루가 되었을까요?


사실, 올림픽에 가고 싶었던 아저씨의 이야기는 2년 반 전, 이 버스 소치(Sochi) 가냐며 추운 강남역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한겨울의 일이구요, 다른 일들도 시간과 공간은 조금씩 달랐답니다.

그런데, 하루가 되었든 몇 년이 되었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요? 정말 가슴 뛰는 건, 이런 멋진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사실’ 아니겠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엔 이런 멋진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내내 밝은 표정으로 천천히 내리시라며 정류장마다 기다려주는 버스기사님, 천 원짜리 빵 샀는데 천 원짜리 과자 얹어 주는 빵집 사장님, 매일 아침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초등학교 앞에서 교통정리하시는 경비원 아저씨...

다들 이 더위 따위에 핑계 주지 않고 이럅! 이럅! 악당을 쳐부숴 나가는 태권브이 같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더위에 홍알홍알 녹아내리지 않게, 마음이 새카맣게 타지 않게, 다시 힘내서 일어날 수 있게.


버스, 지하철, 태권도장, 화장품 가게, 피자 배달… 웃음이 나올 정도로 별 거 아닌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이지요. 그럼 우리도 별 거 아닌 이런 짓, 한번 해볼까요?

저 더위란 놈도, 더 이상 지 힘 따위 자랑하기 민망하게 말이에요.








ending photo/ 2015년 8월,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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