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저는 '답정너'가 아닙니다
엉엉, 그래서 그 팀장이!
그래 그래, 나쁜 놈이네
흐엉엉, 나 때려칠거야. 못해먹겠어
좋아, 딱 때려쳐버리자! 시원하게!
끄억끄억, 근데 어떻게 그래, 카드값은! 월세는!
그치그치, 그럼 팀을 옮겨 보자, 어때?
크헉, 끅, 근데 딱히 갈 팀이 없어
그래도 어디든 지금 그 팀보다는 낫지 않겠어?
어흡, 아냐, 이 팀은 이래서 별로고, 저 팀은 저래서 거지래
음.. 그럼 지금 팀은 그거보단 나은 거네?
끅, 끅, 아니라고, 여긴 진짜 하루도 더 못 있겠다고!
후.. 그럼 일단 좀 쉬어보면 어때? 휴가! 병가!
안 돼, 요즘 우리 팀 헬이라, 나까지 빠질 수가 없어
... 하루도 더 못 있겠다며, 그럼 어쩌자는 거야
그걸 내가 알면 이래?!
나 진짜 지금, 딱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정말 너무너무 힘들어서 숨도 못 쉬겠다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주제에, 걱정하는 친구의 위로 섞인 조언에 하나하나 너무나 논리적으로 깔끔히 반박을 한다. 아니.. 저기 너 지금 죽겠다며. 뭐라도 해봐야 할 거 아니야. 죽는 거 보단 사표 쓰는 게 낫잖아. 사표 쓸 각오면 차라리 휴직을 해.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해 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그저 지금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는 말만 반복하며 얼굴을 감싸고 천지가 흔들리게 울고 있는 것이다. 아니 무슨 이런 답정너가 다 있어, 혹은 얘가 아직 덜 힘들었네 싶겠지만, 지금 딱 죽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거나 엄살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지금, 그만 둘 힘조차 없는 것이다.
때려치운다는 말은, 보통 어떤 힘든 상황을 그저 접어 버리고 '보다 편한' 상태가 되겠다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정말로 때려치우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상태까지 몰려 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무언갈 때려치운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지를.
아니, 그게 뭐가 힘들어? 매일 밤 베개를 적시고, 매일 아침 눈 뜨는 순간을 지옥처럼 만들었던 바로 그걸 그만두는 거잖아. 지금까지 날 벼랑 끝으로 몰아 간 그 죽기보다 싫은 걸 이제 안 하는 거잖아. 밥도 못 먹고(혹은 너무 많이 먹고), 잠도 못 자고, 입만 열면 온갖 부정적인 말들만 싸이퍼처럼 쏟아내고 있는데. 그걸 그만 둘 힘도 없다면서 그럼 그 모든 것들을 다 버티고 있는 힘은 대체 뭔데?
처음에는 그래, 힘들겠다 하며 다독이던 친구들도 슬슬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겠다는 내게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게, 나도 지금 있는 곳이 지옥구덩이 인 건 알겠는데, 왠지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못하겠어. 지금, 딱 죽을 것 같은 우린 왜 죽지 않기 위해 손톱만치도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삼 년간 뺨만 맞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프다. 진짜 겁나 아프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언제까지 맞고만 있어야 하는지, 맞지 않기 위해서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미치도록 아프고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빛이 번쩍하게 매 번 아프고 놀라워 끙끙 앓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슬슬 예상이 되기 시작한다. 어디가 아플지, 얼마나 아플지, 어떻게 하면 조금 덜 아플지, 맞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좀 빨리 나을지. 아픈 건 그대로인데, 이제 이건 내가 '아는 아픔'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갑자기 몸을 움직인다면?
이젠 그 어디로 언제 갑자기 어떤 훅이 들어올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어쩌면 몸을 약간만 틀어도 단박에 이 상황 자체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움직여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아픔이 너무나 두렵다. 다시 말하면, 몸을 피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변화를 주었을 때 아픔의 세기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희망보다는 예상 못한 낯선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가슴을 쥐어뜯는 나도 확실히 아는 게 하나 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런저런 다른 옵션들엔 왜 쉽게 yes를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상황이라면 '당연히 아무거나 괜찮은'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힘든 이유는(모든 직장인이 어쩔 수 없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수많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닌 일들' 때문인데, 그걸 대체할 옵션이라는 것 역시 백 프로 완벽히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밥 먹을 힘도 없는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보다 내려놓는 게 더 힘든 밤을 보내고 있는데, 오늘의 익숙한 고통을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 외에 다른 옵션들을 A부터 Z까지 좌르륵 펼쳐 두고 하나하나 따져 보며 '좀 나은 최선'을 물색할 힘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앞서 말했듯, 무언가를 '때려치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최소한 '뭐라도 하면 지금보단 나아지겠지' 하는 긍정적 방향의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혹 지금 누군가 당신에게 딱 죽겠다며 답 없는 하소연을 늘어놓는다면, 당장의 한두 마디 말로 사태를 함께 해결해주려는 배려심은 일단 넣어 두고 가만히 들어 주라. 말없이 손목을 끌고 가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같이 씹어 넘겨 주라. 그런 후에, 당사자가 너무 많은 부담을 떠안고 '지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짧은 휴가를 권해 보자. 일단은 숨이라도 쉴 힘을 회복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게 곁에 있어주자.
그리고
만일 지금 딱 죽을 것만 같은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너무나 당연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과거는 내가 이미 아는 것이고, 미래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기에 두려울 뿐이라고.
지금 당신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니 당신의 세상이 끝날 일은 없을 거라고.
'옛날은 상처까지 다정한데
앞날은 희망조차 불안하다'
-박범신, '힐링' 중에서.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7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cover photo/ 2011년 10월, 스위스 몽트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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