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직 후 당신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
첫 직장을 나올 때, 평소 존경하던 부장님이 날 불러 말씀하셨다.
“자네, 나간다구?” (그분은 꼭 후배들을 자네,라고 불렀다)
“예.”
“응, 그래. 자넨 어딜 가든 잘 할거야. 아쉽구만.”
이미 수많은 걱정, 조언, 참견, 오지랖 등등에 지쳐 있던 내게 그분의 담백한 말씀은 단비 같았다. 그런데, 그분은 한 마디를 더 하셨다.
“한 번 옮기는 건 괜찮아. 대신 거기 가서는 오래 있으라구.”
오래 있으라구. 오래 있으라구. 오래 있으라구 라구 라구 라구…
아하, 일단 크게 갈아엎었으면 다음엔 오래 버텨야 하는 거구나. 사회에 나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렸던 나는, 직장생활 만렙쯤으로 보였던 그분의 말씀을 막연히 마음에 담았다.
새로 옮긴 곳에서의 첫 보스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직장상사'를 누군가 너무나 훌륭한 솜씨로 잘 섞어 빚어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팀원들은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나의 직원이었고, 카드를 던지며 자잘한 사적 심부름을 시키는 건 예사였으며, 아무런 할 일이 없어도 원 팀 원 스피릿으로다가 다 같이 밤을 새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여러 공모전과 동아리를 거치며 자연스레 광고대행사에 입사한 또래들과 달리 스물여덟이 되도록 광고의 '광'자도 몰랐던 나는 회의 때마다 매번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허둥지둥 꾸려 가기 일쑤였고, 그런 내게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인격 모독을 주거나 새벽 술자리에 불러 내 폭언을 했다. 어디서나 내 할 말 당당히 할 수 있고 나의 일 네 일이 명확했던 외국계 회사 문화에 익숙했던 내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그저 당연하게 참아야 하고 연차가 밥 먹여 주는 문화가 극대화된 광고대행사에서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두고 온 게 얼만데. 내가, 지금 이 지옥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 뭘 버리고 왔는데. 나는 하루하루 견뎠다. 후회란 걸 하는 순간, 내가 뒤로 하고 온 모든 것들이 아까워 죽어버릴지도 몰라서. 지금 생각해보면 힘든 게 너무나 당연했을 객관적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도, 나는 힘들어하지 않기 위해 더 힘들게 이를 악물었다. 나의 이직은 다른 이들의 것처럼 연봉이나 기타 처우를 개선해서 옮긴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붙잡고 버틸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 선택이 옳았어!'라는 나의 확신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후회를 어떻게 해. 돈이라도 더 많이 받잖아, 혹은 회사 문화라도 더 좋잖아,라고 나는 말할 수가 없는데. 그럼 최소한 '난 내가 하고 싶어서 여기 왔잖아!'라고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이직 후 약 일 년 동안 나는 남들 다 겪는 이직 스트레스에 내가 만든 스트레스까지 얹어 싸웠다. 여기서는, 오래 버텨야 한댔으니까.
내가 왜 그랬지?
누군가 내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이라 말하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 탓, 환경 탓 하면 보다 나은 기분이 되는데, 한순간에 이 모든 힘든 상황이 내 탓이 되는 마법, 후회. 여기에 한번 빠지면 정말이지 답도 없다. 저 당시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후회에 있어선 만렙 역대급 보스급이었다. 아주 '제대로 후회하는 법'이라는 책도 쓸 수 있을 만큼. 후회 안 했다며? 는 개뿔, 사실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가슴이 새카맣게 탔다. 모두가 말렸는데, 내가 우겨서 한 선택이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후회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어 매일 우거지상을 썼다. 광고계의 신 같은 존재처럼 여겨지는 박웅현 CD의 '설사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이루어 옳은 결정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말만 주문처럼 외우며 견뎠다.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후회하지 않게 되었는가?
나는 매일 후회한다.
아오, 좀 일찍 일어날걸. 어떡해, 너무 놀았어! 회의 준비 다 못했는데! 망했다. 내가 왜 그랬지?
하루에도 골백번씩 이랬다 저랬다 하며 자괴감에 빠졌다가 가슴을 쳤다가 또 설렜다가 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일상을 산다. 그런데, 더 이상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그 결정'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느냐고? 참 힘 빠지게도 답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내가 후회를 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 결정'이 옳았느냐 틀렸느냐를 붙잡고 혼자 씨름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개의치 않고 흘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열심히 했던 고민과 판단들이 점차 자기들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 보였다. 애써 후회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생각해 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과거는 옥X크린이라고. 힘들었던 건 깨끗이 빨아 없애고, 좋았던 기억들만 컬러풀하게 점점 더 선명하게 만들어 우리를 죄어 온다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 꽤 중요한, 그리고 때론 고통을 수반한 결정에 대해 우리는 그 결정이 옳았음을 빨리 확인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선택은 51:49라고 믿는다. 내가 이 선택을 한 것은 이것이 '2'만큼 더 좋았기 때문이지 이것이 저것을 99만큼 압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선택에 49만큼의 후회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하다. 후회하지 않으려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조금만 믿고 기다려보자. 당신은 충분히 고민했고, 그 선택은 옳았다. 당신의 시간이 그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다시 3년 전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안쓰러운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후회해도 괜찮아.
후회는 나쁜 게 아니야. 맘껏 후회해.
후회를 한다고 해서, 네 선택이 틀렸던 게 아니야.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7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cover photo/ 2012년 12월, 체코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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