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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Aug 23. 2017

치열함은 죄가 없다

22/  그래도 치열한 그대, 꺾이지 말기를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 작열하는 태양처럼, '프듀'의 돌풍이 지나간 뒤의 2017년 여름은 그들을 응원했던 '국프' 들에겐 그 언제보다 뜨거운 계절이 되고 있다. 올봄 우리를 웃고 울렸던 많은 연습생들이 보이그룹으로, 솔로 가수로 멋지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현실에서의 서바이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새벽 두 시까지 잔인하게 이어지던 그 프로그램의 최종회를 보다가 나는 조금 울컥했다. 내가 응원하던 연습생이 탈락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야 편집으로 장난을 치건 말건 한결같이 청량한 소년들의 미소에 눈이 시려서도 아니라, 그 시각까지 연습생 한 명 한 명의 치열함에 목이 터져라(혹은 엄지가 닳도록) 장외 응원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저렇게나 많은 연습생 사이에서 노력한다고 뭐가 되겠냐'던 초반의 회의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회를 거듭해가며 소년들의 간절함에 감정을 이입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노력의 ‘가성비’를 언급하지 않았다. 꿈에 한 발짝 다가선 소년들도, 아쉽게 발을 멈춘 소년들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그 정도로 치열히 해 보았다는 것 자체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너무너무너무


이 모습이 울컥하리만치 인상적이었던 것은, 요즘처럼 노력이라는 가치가 홀대받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노력해 봤자 ‘노력한 만큼’ 이루기 힘든 사회에서,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프레임은 역설적으로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들의 치열함을 빛바래게 했다. 노력이 노오력의 공격을 받는 동안, 꿈이라는 단어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낯간지러운 낡은 말이 되었고, 누군가의 치열한 오늘엔 응원 대신 이런 핀잔이 따라붙었다. ‘뭘 그렇게까지 빡세게 하냐, 그래 봤자 너만 힘들지.’ ‘너무 그렇게 팍팍하게 살지 마라, 어차피 다 이루지도 못할 거.’


직장을 다니며 분초를 쪼개 이직을 했고, 급작스런 밤샘이 일상인 광고 일을 하면서 최근엔 유학과 출판 준비까지 병행했던 나 역시 그렇게 편한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어차피 그 노력들이 전부 보상받지는 못할 텐데, 넌 너무 욕심내서 애쓰고 있다고. 네가 그렇게 꿈이란 걸 꾼답시고 굳이 발가락에 힘주고 사는 바람에,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괜히 불안해지지 않느냐고. 요즘 뭐 하고 사느냐, 는 질문에 무엇 무엇을 하며 산다는 대답을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매번 다른 이들에게 '너무, 혹은 필요 이상으로' 빡쎈 내 인생에 대한 변명을 덧붙여야 했다. 요 며칠 코 앞으로 다가온 유학 준비에 몸이 고됐던지 이곳 저곳 잔병치레를 했는데, 덕분에 내 뒤통수엔 한 마디가 추가로 꽂혔다. "거 봐라!"


답답한 것은, 나는 (엄마도 아닌) 남에게 내 인생을 투정 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힘들어 죽겠는데 해내고는 싶다'며 답정너 식의 위로를 기대하거나, 바쁜 일상에 대한 타인의 동조나 이해를 구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 '넌 너무-'로 시작하는 말들이 너무 듣기 싫어 때로 전혀 바쁘지 않은 사람 코스프레를 했다면 모를까. 내 인생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된 치열한 내 삶의 방식은, 종종 내 인생에 크게 관심 없는 타인에게 비정상적인 ‘노오력’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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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함은 선택이다


많은 경우, 노력은 보상받지 못한다. 이건 팩트다. 그러나 ‘그러니까’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훈계와 ‘그럼에도’ 누군가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노력은 크게 다르다. 후자의 치열함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인생엔 그렇지 않은 삶에 비해 더 많은 좌절의 폭풍우가 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그런 궂은 날을 선택해가며 사는 데에는, 좌절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크기의 간절함이 있다. 투자한 노력의 대부분을 돌려받지는 못할지언정, 타는 듯한 현재의 갈증을 풀기 위한 방법을 찾고, 파고들고, 찔러보는 시도라도 해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혹은 어쩔 수 없이) 사방으로 고민의 촉수를 더듬거리고, 오늘의 끝에 꾸역꾸역 내일을 위한 시간을 이어붙인다.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소진한 그 에너지가, 다시 오늘의 나를 내일로 밀어주는 가장 센 삶의 동력이 된다.


덮어놓고 '넌 왜 노력하지 않아? 노오력을 해!'라는 말이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뭐하러 그렇게까지 노력하느냐는 시선에도 나는 지고 싶지 않다.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이 문제지,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노력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혹은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래도 노력해볼 것인가의 여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다. 그 치열함은 타인이 강요할 수도 없고, 반대로 폄하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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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꿈꾸고 있다면


언제나 한쪽 다리를 오늘과 내일 사이 어디쯤 걸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을 삶과 동시에 다음을 준비하는 이의 시간은 필연적으로 위태롭다. 언제가 될지 모를 변화의 순간, 무엇이 될지 모를 내일의 내 모습을 위해 소중한 오늘을 쪼개어 이력서를 쓰고, 연차를 써 가며 강의를 찾아 듣고, 아직은 말도 안 되는 창업 계획과 씨름하느라 밤을 늘이는 일들은 때론 '너무' 힘든 일이긴 할 것이다. 가끔씩 의지와는 다른 버거움이 훅 찾아들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치열한 그대, 꺾이지 말기를. 외롭지만, 이따금 핀잔을 듣겠지만, 언젠가 치열함이 ‘치이열함’이 되는 날이 올지라도, 본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양보하지 않기를. 주어진 상태를 원하는 다른 상태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 엄청난 일을, 엄청난 에너지를 쏟으며 당신이 해내고 있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변하지 않으면, 내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으리란 것을.


오늘도 조금씩 조금씩 꿈을 현실로 분갈이 중인 당신의 치열함을, 나는 치열하게 응원한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단지 간절함만으로 이룰 수 없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이 글의 내용은 8월 16일 자 동아일보 '2030 세상'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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