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를 더듬더듬
필사는 정신 건강에 정말 좋다.
차분하게 좋은 글을 읽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옮겨 적으면서 문장 하나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펜이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고 글자가 모양새를 갖추는 모습에 온전히 시각적 주의를 쏟으면 그 자체가 명상의 시간이다.
좋은 글 필사를 하면서 글씨 명상을 하는 효과라고나 할까.
요즘 서점에 가면 영어 필사와 관련된 책이 유독 많이 보이지만, 내가 철없고 어렸던 옛날 옛적에도 영어 문장 필사는 인기 있는 영어 공부 방법 중 하나였다.
만만한 책을 하나 골라 필사를 해 본다. 무슨 책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시작할 때는 나름 의욕이 충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필사를 하다 보니 영어 문장을 익히는 것 말고도 한 가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어 필사가 나의 정신 건강에는 상당히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영어 문장 자체가 생소하고, 영어 글 쓰기는 더 생소한데, 글씨 쓰기 자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보니,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으면서 나의 얼굴은 점점 생기를 읽어 팥죽색이 되었다.
재미도 없고, 영어도 늘지 않았다.
한 번 공책에 끼적거려놓고 그 이후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필사는 무슨 필사람.
그러다가 최근에 영어 필사로 공부하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필사 힘들던데 참 대단해 보인다"라고 했더니, 필사하고 있으면 오히려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단다.
충격.
정말 충격적이었다.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니.
나는 그 '공부하는 느낌'이 나서 싫어했던 거였는데!
이래서 사람마다 영어 공부 방법이 다 다를 수밖에 없나 보다. 내가 영어 필사를 싫어하는 이유가 누군가에게는 그걸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오늘도 영어를 배우며 인생을 배운다.
[삽질 복기]
- 영어 필사는 안 하련다.
- 하더라도 입이 다 트이고 하련다.
- 영어 필사할 시간에 문장 하나 말하기 연습을 더 하련다.
- 손보단 입으로 때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