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설거지를 즐기게 되다니
요리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
이런저런 재료를 때려 넣고 휘휘 저으면 무언가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나오는 재미가 있다. 먹을 거 갖고 장난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먹을 거 갖고 장난치는 건 정말 재미가 있다. 한번 맛 들이면 생각보다 헤어 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빨래는 그렇지 않다.
청소도 그렇지 않다.
설거지도 그렇지 않다.
이것저것 때려 넣어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재미가 없다.
매일 똑같이 해야 하고, 허리 빠지게 해 놓으면 일이 또 쌓인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 해도 해도 똑같고, 해도 해도 그대로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통해 쌓아 놓은 협상 능력이 쓸모가 있었다.
다년간의 협상(및 강요·협박) 끝에 빨래와 청소를 남편에게 떠넘겼다. 하지만 나의 협상 능력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었고, 그래서 설거지는 내 몫이 되었다.
밥을 매일 먹고, 설거지도 매일 해야 한다.
하기 싫은데 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군이 하나 있었다. 귀에 쏙 꽂으면 수전에서 나오는 물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가 마법처럼 잦아드는 바로 그 요물,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
귀를 쏙 막아 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영어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했다.
영어 오디오북은 본질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활동이 결합되어 있다. 독서, 그리고 영어 공부. 시간이 없어서 못 하는 거지, 이 두 가지 활동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할 수도 있다.
오.
그렇게 설거지하는 시간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은근히 기대도 되었다.
남편이 주말에 설거지를 해주겠다고 하면 완강히 거부했다. "안돼, 나 영어 오디오북 들을 거야."
그렇게 설거지를 하면서 오디오북을 신나게 들어댔다.
설거지가 즐거워지다니.
오늘도 설거지를 꿈꾼다.
오늘도 설거짓거리가 많아지기를 꿈꾼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삽질 복기]
- 과거의 그 많은 설거지 시간 동안 영어 오디오북을 들었더라면 참 좋았을걸.
- '빨래와 청소도 내가 하면서 영어 오디오북을 들으면 더 많이 듣겠네?'라고 잠시 생각했으나, 다행히 금방 정신을 차렸다.
- 생각해 보니 주말에 남편이 설거지해주면 나는 그냥 앉아서 오디오북 들으면 되는 거잖아(바보인가?).
- 정신 차리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