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하루하루 자라는데, 부모 눈에는 아이가 마냥 어리게 보이며, 마음의 눈에 비치는 아이로 대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바꾼 것은 크게 세 번 정도이며, 엄마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며칠 전 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친구들하고 늦게까지 만나고 있을 때, 귀가 재촉하는 전화 한 번 해주면 안 돼?”
딸은 친구들하고 만나고 있을 때, 다른 엄마들은 9시쯤 되면 전화하는데, 엄마는 왜 안 하냐며 나에게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얘기했다.
“그럼, 엄마가 8시부터 전화할까?” 하며 딸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엄마, 엄마는 왜 가운데를 몰라?”하며, 딸은 삐지는 말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말에 나는 딸이 얘기하는 가운데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 기말고사를 치르기 전 딸은 가족 단톡 방에 이렇게 문자를 넣었다.
“대학생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법”이라는 문자를 넣었다. 자신의 성적에 대하여 귀여워하고,
쪼그마해도 이해하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성적을 묻는 딸에게 4.5만 점에 4.1점 이상을 받았다고 하니, 딸은 나보고 어떻게 그 점수를 받느냐며 괴물이라고 했다. 딸의 말처럼 그럴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한 공부하고는 다르게 대학 공부는 청춘의 맛을 느껴서인지 너무 달콤했다. 딸은 모르겠지만, 딸의 귀가 시간에 최대한 초연하려고 했으며, 딸의 성적에는 관심을 보였다. 딸은 A+을 받은 과목에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재잘거렸으며, 딸은 평점이 원주율보다 높다고 알려주었다. 자신의 점수는 선배들이 받은 평점보다는 좋다고 하였다. 나는 딸의 평점보다는 갑자기 온라인으로 진행된 수업에 재수강해야 하는 과목이 나올까 걱정했다. 코로나로 원룸이 아닌 집에서 공부했기에 딸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는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쳐 준비가 안 된 온라인 수업에도 F를 받은 과목이 없으며, 최선을 다한 딸이 대견했다.
처음 내가 아이를 대한 방식을 바꾼 때는 아이가 5살 무렵이다. 아이는 처음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어 너무 좋아했고, 하루는 그곳에서 아이와 엄마의 성격, 성향을 검사를 해주었다. 나는 결과지를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결과지에는 아이가 창의성은 있지만, 엄마가 주도적으로 끌고 나간다고 적혀 있었다. 나 나름대로 아이의 주관을 길러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지 한 장에 나의 어린 시절도 겹쳐져서, 종이는 노랗게 보였다.
내가 대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나와 동생들은 엄마의 치마폭에 쌓여 있었다. 조금은 유난한 엄마의 성격 때문에, 엄마의 치마폭 안에서만 있어야 했으며, 막내를 빼고는 내성적인 성향으로 자랐다. 나는 치마폭에 매우 답답했으며, 이런 성향은 사회에 나오면서 나를 힘들게 했다. 나중에 내가 아이를 낳으면 정반대로 키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아이를 가졌을 때 쑥스러워하면서도 열심히 뱃속 아이에게 말도 걸어주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들려주기 위해 약간은 수다스러운 엄마로 변해갔다. 둘째 아이의 조산기와 내가 무릎을 다치면서 큰애는 3살무렵에 일찍 철이 들어버렸고, 나는 아이보다는 아픈 나를 먼저 추슬러야 했다. 그 결과 5살 어린이집 검사에서는 누런 종이로 와 닿았으며, 출발선이 아닌 빼기 선으로 많은 퇴보를 해버린 것이다.
그 후는 주도의 방식을 아이가 앞장서도록 하였으며, 아이는 또다시 재잘거리며, 조금은 외향적인 성향을 지닌 아이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 한 번의 무릎 수술을 견디면서 우리는 그렇게 익숙해져 갔다. 아이에게 많은 책을 읽혀주고 싶었던 나는 학습지 선생님을 하면서, 커다란 책장 3개 이상의 책을 사주었고, 정상이 아닌 무릎으로 주말에는 여러 종류의 박물관과 체험을 시켜주었다. 학습지 선생님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름의 엄마표 수업도 했다. 친정엄마는 이런 나를 보고 “참으로 유난하고, 대단한 엄마”라고 했다. 나 역시 유난한 엄마가 되었지만, 친정엄마와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두 번째로 방식을 바꾼 때는 아이가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저녁도 먹어야 하므로 7시부터 전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아이에게 일이 생겨 많이 힘들어했을 때, 처음에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같이 생의 바람을 타면서 같이 흘렀다.
세 번째로 방식이 바뀐 때는 아이가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였다. 보통의 삶을 바랐기에 인문계에 가기를 바랐지만, 3년 내내 공부에 치여 살기는 싫다고 하였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제과제빵을 하는 학교로 보내면서, 기숙사도 보내게 되었다. 기숙사를 보내게 되어 마음이 아팠지만, 엄마니까 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 생활 1년 동안 아이는 많이 힘들어했으며, 통학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어서 아이가 잘 지내도록 다독거렸다. 다행히 1년을 잘 버티면서, 아이는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자격증 구비를 위해 외부 학원에 다녀야 하는데, 기숙사생에게는 외부 학원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이와 얘기를 해보고, 아이의 의지가 확고하기에 나는 원룸을 얻어주었다. 고등학생이었고, 여자애였지만 아이가 잘 해내 갈 것이라는 생각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기숙사를 나가면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학교생활도 안 좋을 수도 있다고 하며, 아이가 기숙사에 남기를 바랐지만, 아이와 나는 앞으로 한발 나아가기 위해 기숙사를 과감히 나왔다. 처음에는 아이가 늦게 집에 들어가면, 자주 전화하고 했지만, 아이가 매번 늦을 때마다 쫓아가지도 못하니, 매 순간 시간을 보며 아이를 보채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는 초저녁에 한번 문자나 카카오 톡으로 대화하고, 집에 들어가면 문자 보내라는 방식으로 하였다. 귀가시간뿐 아니라 다른 것도 하나씩 아이가 바람 살을 타도록 하였다.
아이가 올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또다시 학교 근처의 원룸을 얻어주었고, 아이는 자신의 일정만 얘기하고 다닌다. “자유를 누리는 대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라”하며 아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이가 누리는 자유는 경제적인 부분 말고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다. 아이는 선배와 이야기하면서, 여자애가 방 얻어서 생활하는 것, 친구들과 모임에서 귀가를 재촉하는 부모 전화에 엄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듯하다. 전자의 경우는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그만큼 믿어주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후자는 아직은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거 같다. 아이의 유년기에 충족치 못한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되면서, 육아서 등 여러 가지 것을 읽고, 그대로 해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현재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의 아이는 조금 더 좋은 방향, 나보다 좋은 성향, 성격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는 때로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 등 여러 가지 한 번에 다 잘하려고 하며, 100점 만점에 200점을 받으려고 한다. 엄마의 길을 가면서 쉽고 좋은 길만 가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는 비탈길도, 때로는 옆에 낭떠러지가 있는 길을 가면서, 오로지 엄마, 아내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슈퍼우먼이 되려고 한다. 길의 끝을 모르기에 처음에는 슈퍼우먼이 되어도 지치지 않으나, 굴러오는 돌 하나에 쉽게 쓰러질 수도 있으며, 그 스트레스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나중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갈 수도 있다. 때로는 엄마의 자리만 유지되어도 좋으며, 엄마의 인간적인 모습에 아이와 남편이라는 든든한 백을 얻을 수도 있다. 어떤 계기로, 나는 슈퍼우먼이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여기저기 아픈 나를 돌보며, 내가 아니어도 잘해나갈 거라는 믿음으로 하나씩 자유를 넘겼다. 그 결과 지금은 큰아이, 작은 아이 모두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치마폭이 아닌 엄마의 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때로는 엄마의 정속에 치마폭도 넣으려고 하는 나를 경계해본다.
아이의 말처럼 나는 가운데를 모르는지도 모른다. 극과 극을 달렸던 엄마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 꿈꾸던 것은 ‘아이가 크면, 엄마와 친구같이 지내는 것’인데, 이것은 성공한 듯하다. 딸 하고는 책 읽는 취향이 비슷해서, 추리소설, CSI, 문학책, 소설 등에 대하여 같이 얘기도 하고, 브런치 작가를 꿈꾸고 글을 발행하기 전 나의 글을 읽어준 것도 딸이다. 딸은 글을 읽으며 문맥이 이상한 곳을 얘기해 주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향에 농익어간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으면서 은유의 중용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시에는 은유가 들어가야 하고, 적절한 비중의 은유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은유와 방언을 너무 부당하게 하면, 웃음을 자아내는 목적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엄마의 중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가 처음 걷기 연습을 하다가 넘어졌을 때, 엄마는 아이의 울음과 부상에 대한 생각이 1차로 들기에, 아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의 시간에 얼마나 조바심이 드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치마폭을 휘두르게 된다. 시학에서의 중용은 웃음거리이지만, 엄마의 중용은 아이의 인생뿐 아니라 엄마의 인생도 같이 영향을 미치기에, 중용의 길은 매번 어려운 숙제인 거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부가 같이 의논을 해서 아이를 대하면 좋지만, 어떤 일은 그런 시간이 오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결정해야 하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얘기하는 가운데를 잘 걸으려면, 언제나 그렇듯 아이의 생각을 경청해봐야 할 듯하다. 오늘도 재잘대는 딸의 말에 웃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마음을 열어본다.
딸, 가운데를 같이 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