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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마녀 Aug 08. 2020

궁상의 달인?

나는 시를 쓰는 여자다

 

  얼마 전 시원한 바다 향기가 물씬 나는 여름 전화를 받았다. 최근 시 응모를 하고 있었으며, 몇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시인 당선이 되었다. 이 전화를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보다 더 감격스러웠으며, 오래된 숙명과도 같은 숙제를 해냈기 때문이다.  시는 궁상의 산물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oo아, 인제 그만하고 와서 씻어”라고  엄마는 말하면서, 나에게 여자의 조신, 얌전히 놀기 등에 대해 잔소리했다. 초등학교 2학년 전까지는 시골에 살았으며,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느끼며,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꼭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하루는 닭이 똥을 누었는데, 개똥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기에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똥을 해부했다. 나의 기억은 여기서 끝인데, 엄마는 사족도 줄줄이 단다. 꽃, 나뭇잎, 풀을 뜯어서 빻았고, 그것으로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역할놀이를 했다. 엄마는 나에게 유별나다고 했다. 때로는 엄마의 잔소리 덕에 나의 얼굴은 비교적 봐줄 만했지만, 손은 땟 국물과 나뭇잎 물로 범벅이 되었고, 옷도 여기저기 물들어 있었다. 어릴 때는 여자라는 인식 없이 놀았으며, 지금 생각해봐도 조금은 유별난 아이였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초등학생처럼 흙장난은 하지 않았지만, 사물을 관찰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달아주는 것은 여전했다. 사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킬링필드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면서 총앞에 떠는 지식인을 보며, 나는 공산화의 무서움과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떠올랐으며, 마지막은 부르주아를 연기하는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한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반응하려다가, 엄숙한 분위기에 나는 웅크렸다. 그 일을 계기로 다른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누구와도 마음속 얘기를 터놓지 못해서 벙어리 냉가슴이었고, 점차 나 자신이 두렵고, 무서우며, 나 자신이 싫었다. 우연히 친구 따라 간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읽었고, 그중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푹 빠졌다. 싱클레어가 나의 분신 같았으며, 책에 나오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처럼 하려고 애를 썼다. 예쁜 노트를 하나 장만해서 그 안에 짧게 때로는 길게 시와 글을 적었고, 가끔은 그림도 그렸다. 사물을 관찰하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그 노트 안에서만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한 권을 다 채우기도 전에 엄마에게 들켜서 공부에 방해된다며 빼앗겼고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엄마는 그때 글 쓰는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생각해서 그 길이 아닌 평범한 길을 걷기를 바랬던 거 같다.     



  그 후는 독서를 하면서 상상을 즐겼고, 글은 쓰지 않았다. 빈 연습장에 꽃을 말려 놓거나 그림을 그렸다. 직장 생활을 하며 이제는 엄마와 맞대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고 얼마 안 되어 나에게 CAD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과 시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분은 나의 시풍이 이해인 수녀님의 시풍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내에게 시를 쓰는 재능이 있다고 얘기해 주셨다. 선생님은 현실판 데미안 같았으며, 나는 그분을 통해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 그 후 용돈을 모아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사서 읽으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풀려고 했으며, 알을 깨고 나오려고 퍼덕거렸다. 하루에 시 하나 아니면, 2일에 하나 정도 썼다. 신랑을 만날 때도 시를 썼으며, 계속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첫 만남에 내가 쓴 시 2개로 신랑을 테스트하기도 했다. 그때 신랑은 시에 실린 나의 감정을 잘 읽어주었다. 지역신문이나 사내 잡지에 투고해서 실리기도 했고, 라디오 방송국에 시와 사연을 보내서 방송을 타기도 했다. 이런 작은 성공은 내가 계속 연필을 들게 했고, 나는 시를 쓰면서 온전히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시 쓰는 여자야, 앞으로 시인이 될 거야’ 이렇게 외쳤다. 이때 쓴 시는 거의 300개 정도 되는데, 너무 감격스러워 표지와 속지를 워드로 다 만들어서 자작시집을 만들기도 했다. 5권 정도 만들어 아는 지인들에게 주었고, 그중 한 권은 신랑한테 주었다.



<아가씨 시절 썼던 시 노트>


<나의 첫 자작시집 중 둘째 페이지와 세 번째 페이지>



  결혼하면서 시는 ‘쓴다’, ‘잊는다’라는 두 단어로 압축되었다. 기쁠 때도 썼지만, 힘들거나 슬플 때 더 시를 쓰고 품었다. 그러다 7~8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인 등단을 하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몇 년 전 지역 도서관에서 하는 문예 창작반을 다니면서, 시의 기본과 퇴고 실력을 키웠다. 바로 등단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채, 건강이 안 좋아져서 시를 또다시 잊었다. 올해 1월 말에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자작시를 포스팅했다. 새는 이제 또다시 알을 깨고 나오려고 했으며, 이제는 날개를 펴고 바람을 조금씩 타고 싶었다. 자작시 도용 문제 때문에 블로그 최적화도 해 놓았고, 시는 조금씩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에 날개를 달아주는 방법으로 브런치 작가를 꿈꾸었고, 작가가 된 후 시도 날개를 달았다. 일반 글 몇 개가 DAUM 메인과 브런치 메인을 갔지만, 시의 조회 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시를 브런치에 올려 개수가 어느 정도 차서 시집 발간을 할 것인지, 아니면 시인 등단에 한 번이라도 도전해 볼 것인지 말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는 도용 문제는 잊어버렸고, 시는 풍성해져서 나는 도전을 즐기기로 했다. 브런치 작가도, 시인 등단도 한 번이 아닌 몇 번의 날갯짓으로 가능했지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면 데미안의 새를 생각한다.


  시는 내가 햇살을 느낄 때도, 그림자에 파묻힐 때도 함께 했으며, 새는 같은 알이 아닌 매번 다른 알을 깨고 날개 짓을 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헤시오도스(신통기를 쓴 역사가)는 자신의 시재(詩才)는 무사(Mousa) 여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천병희 옮김 p10)”고 기술되어 있는데 나에게도 이 무사 여신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는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봐준 벗과도 같은 존재다. 아주 오랜 벗과의 차 한잔은 너무 향기로우며, 때로는 슬프기도 한다. 예전처럼 '시'라는 울타리에서 헤매지는 않으며, 한 잔의 오묘한 맛을 즐기며, 벗이 건넨 차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의 첫 독자도 생각난다. 나의 시를 응원해 주셨던 분이 아니었으면, 나는 나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하고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마음이 하트하트 분이라 현재 내 모습에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실 거 같다. 그분을 언제 한번 만나고 싶다.


"시어의 상징적으로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았다. 상징은 은유에 비하여 훨씬 복합적이며 원관념을 암시한다. 상징적인 시어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추상적이며 무한한 상상력을 확장시켜 사물의 단층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힘의 결과물로 표출하고 있다"(시 등단 심사평에서) -월간 시사문단 8월호로 시인 등단



<왼쪽은 고등학생 시절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블로그에서 코로나 종식 릴레이로 그린 것입니다-2020년 3월>



<내가 즐기고 있는 뜨개 가방>



   20년 넘게 품어온 시 사랑은 제대로 첫 삽을 떴다. 이제는 시를 쓰는 여자, 글쟁이로 남고 싶다. 시는 나를 나답게, 나를 나로서, 품위 있게 만들어 주며 잊혀 가고 있는 나의 이름 세 글자를 찾아주었다. 여기에 그림도 살짝궁 포함해야 할 거 같다. 때로는 그림이 시를 이끌기도 하고, 시가 그림을 이끌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 옆에는 그림이 있으며, 각각 다른 방향에 독서, 요리, 뜨개질, 자연, 식물 등이 있다. 각각의 것들이 시나 글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런 나를 보고 궁상맞다고 했으나,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는 궁상이라는 단어 대신 팔자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꿰찼다. 글을 쓰는 여자의 팔자가 드센 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삶에 굴곡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굴곡에 때로는 중심에서 밀려나서 힘들기도 했지만, 작가가 된 지금은 스펙트럼이 풍부한 이야기로 또다시 중심을 누비고 있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의 2/3 정도>



  나는 시 쓰기, 독서, 뜨개질, 요리, 그림, 필사, 식물 키우기 등 다양하게 그때그때 취미를 즐긴다. 나의 N잡 취미는 다른 줄기를 가진 듯하지만, 뿌리로 내려가면 나라는 하나의 뿌리에 엮어져 있다. 나의 첫 자작시집에 나오는 내용처럼 오늘은 이 조합, 내일은 저 조합으로 잘 섞어서 시나 글을 쓴다.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가져볼 생각을 하며, 햇볕도 듬뿍 받아 광합성도 누려보며 맛있는 열매도 빚어보고, 가끔 구름이나 바람을 따라 유랑도 해보고 싶다. 순풍에 돛을 달고, ‘나’라는 항해는 이제 시작된 듯하며, 어떤 이야기를 그릴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오늘도 시 한 젓가락? 상상력아, 놀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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