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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마녀 Aug 03. 2020

잿빛의 뜸

잿빛이 끄적거릴때


  잿빛의 이야기는 최근 필사한 시에서 잿빛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 단어를 보자마자 꼬마 마녀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한 단락씩 필사하는 곳에서 나오는 단어를 섞어서 각 장면을 구성해보았어요. 이런 글을 적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최근 감성이 더 흘러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봐요. 아직은 알 수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또 써보고 싶어요. 처음이라 많이 떨리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잿빛은 깊은 바다 모래 속에 몸을 숨기고, 하루하루 숨만 쉬었다. 오래전 어미가 잿빛을 떠나고, 잿빛은 계속 그 자리에서만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속에 한줄기 태양이 비친 것 같았다. 한줄기 빛은 태양이 아닌 문어의 머리였다.      



  잿빛은 문어에게 물었다.

"너는 왜 머리가 동그래?"

"나는 이 머리가 좋아. 물살을 헤치고 나가기 편해. 너는 왜 잿빛이야?" 하며 문어는 무심하게 물어봤다.

"음……. 음……. 나는 원래 무슨 색깔이었는지 몰라.

눈을 감았다 뜨니 이런 색이야.

너는 바다에서 무서운 것 없어?" 잿빛 역시 무심을 가장하여 물어보았다.     


  반짝이는 문어 머리에 닿았던 빛은 이내 서툴러졌다.

그때 물살이 소용돌이치면서, 저 멀리 상어가 부풀어 오르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잿빛은 순간 서투른 배포라 들숨을 마시며, 초조한 눈으로 문어를 찾았다. 문어도 얼른 피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문어는 우정에 감사한다며, 거무튀튀한 먹물을 분사하며 뽈뽈뽈 사라졌다.

상어는 모래에 파묻힌 잿빛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들창코를 벌름거리며 또 다른 냄새를 찾아 씩씩거리며 헤엄쳐갔다. 잿빛은 상어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날숨을 쉬면서, 쥐 났던 다리를 주물렀다. 문어를 친구로 생각했던 자신의 오해에 시렸다.



  

  잿빛은 바다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검디검은 바다가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열정을 듬뿍 담고, 때로는 격정으로 흐르는 것이 로망으로 와 닿았다.



실로 바다는 서해에서는 잔물결로 실룩거렸고, 남해에서는 흥에 겨운 듯 비트를 틀었다. 동해에서는 오직 자신만 존재하는 것처럼 군림하기도 했다. 처음 생명을 품으며, 잉태시킨 이도 바다이니, 태고의 숨결에 잿빛은 오금이 저렸다.



“저……. 저…. 제가 따라다녀도 될까요? 문어는 도망갔어요. 바다님을 따라다니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라며 잿빛은 얘기했다.

“재미…. 재미라.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그대로는 힘들어. 내 마음의 응어리를 털어봐. 항해의 묘미는 뱃멀미와 태풍이야. 즐기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지.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하며 바다는 물보라를 튕기며 사라졌다.     


<최근 '바다로 가자' 시를 필사하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잿빛은 응어리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응어리? 상처? 나를 무겁게 하는 짐? 삶의 때와 흔적…

잿빛은 팔을 뻗어 마음의 우물에서 이끼가 살짝 내려앉은 돌 하나를 꺼내 보았다. 슬슬 문지르는데도 돌은 금방 제 색을 찾았다.

“아, 예쁘다. 이게 내 것일까?” 잿빛은 그 돌을 보며 반신반의했다.


“바다님 기다려요. 한꺼번에 가벼운 손과 다리로 떠나면 둥둥 떠다닐지도 모르지만, 내 인격은 부서질지도 몰라요. 더딘 걸음이라도 발자취를 따라 나의 텐센과 템포로 흘러볼게요”

갈매기가 바람을 타며 끼룩하는 소리가 잿빛에게는 “힘내”라고 하는 듯했다.     




  잿빛은 주변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닦다 만 돌만 쳐다보았다.

“이것은 왜 안 되는 거야?” 잿빛이 어깨까지 적셔가며 꺼낸 돌은 몇 개 되지 않는데, 나머지는 꺼낼 수조차 없다는 사실에 돌만 걷어차고 있었다.

그때 아귀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얘, 너는 뜸도 모르니? 간절히 원하는 마음은 그 정도면 됐고, 너를 구할 수 있는 도구를 생각해봐. 뜸이 들면, 익기도 하니까”

“뜸, 익는 것, 도구?” 잿빛은 이리 중얼대며, 저 녀석 뒤를 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눈으로 본 아귀는 너무 멋져 보였다.     




  잿빛이 며칠 머리를 싸매도 뜸이라는 단어는 성큼 다가오지 않았다. 하얀 도화지에 뜸이라는 단어를 적고, 조금씩 천천히 끄적거렸다. 어느 날은 연필, 어느 날은 색연필, 어느 날은 물감으로 적기도 하고 그리기도 하며 하얀 도화지를 채워갔다.


잿빛의 도화지에는 문어도, 갈매기도, 글씨도 자신의 색을 입고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재잘거리고 있었다.

어느 날은 한 줄, 어느 날은 세 줄을 적으며, 잿빛은 ‘뜸’이라는 한 단어만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잿빛은 돌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깨를 적시지 않아도, 돌은 하나둘 무지갯빛을 내며, 잿빛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도 이제 익을 수 있나 봐. 설익지 않아도 돼”. 행복 한 조각이 잿빛의 귀에 걸렸다.

잿빛은 오늘도 하얀 종이에 연필로 자신을 끄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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