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마마녀 Sep 24. 2020

식물도 CPR이 필요하다

<대문사진의 왼쪽은 병들어 시들어가는 봉선화, 오른쪽은 소주와 물의 비율을 1:5 정도로 희석하여 두 번 정도 주고 다시 살은 봉선화>


CPR은 심장과 폐의 활동이 갑자기 멈추었을 때 실시하는 응급처치이다. 식물도 CPR이 필요할까? 식물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크는 녀석이 아닐까?



  봄 끝자락에 볼일을 보고 한적한 시골길이 마음에 들어 딸과 산책을 했다. 산책하다 여러 꽃이 활짝 피어 있는 어느 집 화단에 이르렀고, 꽃들을 구경했다. 울타리가 없던 집이어서 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때마침 저녁때라 주인분도 나오셔서 화단 손질을 하셨다. 화단을 꾸미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지만, 대화를 통해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것을 알아봐 준 것이 고마우셨는지, 주인분은 나에게 봉선화 화분을 주셨다. 봉선화 화분을 받으며, 아직도 통하는 시골인심에 놀라면서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왼쪽은 6월 초 받아온 모습, 오른쪽은 CPR 후 다시 살은 봉선화>





  베란다 따듯한 양지쪽에서 바람 한 점과 봄 햇살 한 줌에 나는 조금씩 커가고 있었다. 옆에 있는 화분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4층이라 햇볕도 제법 많이 들어 따듯했으며, 옆에 있는 식물들이 윗 자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저렇게 자라겠지. 이 집주인은 그래도 식물의 꿈을 찾아주려 애쓰나 봐. 나도 그 사랑에 쑥쑥 클 수 있겠지.

  아, 점점 더워지네…. 여름이 빨리도 오는군. 너무 더워서 짜증 나…. 그래도 이 계절이 지나면 예쁜 꽃도 피고, 나의 잎과 꽃으로 주인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일 수 있겠지

 뭐야…. 뭔 놈의 비가 주구 장창 와…. 장마라는 놈은 시도 때도 없고, 왜 이리 기냐고….

아, 덥다고 투정 버리는 때가 그립네……. 세상사 새옹지마인가?

뭐지…. 뭐야…. 나의 잎이 왜 이렇지? 왜지 왜? 아직 몇 개의 장마도, 태풍도 남았다던데, 잎에 왜 벌레 낀 것 같냐고? 왜 조금씩 말라비틀어지냐고?

그래도 꽃을 피웠는데, 이대로라면 나는 병들어 죽겠네…….     






  나의 인생에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은 2004년 10월 24일이다. 병원 신세를 계속 지는 아이들에, 위풍이 작은 방을 골라 커튼을 걸러 올라갔다가, 높은 창문에서 떨어졌다. 두 발로 착지했지만, 무릎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픈 것이 잠시 내 곁에서 울먹이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아이들은 4살, 2살(작은 애는 돌 지난 지 6개월)이었다. 첫 진단은 인대가 늘어난 것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십자인대 파열에, 무릎 연골 반 이상 손상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병원에 갔더니, 10%의 인대가 남아있어 보조기 차고 3달을 가만히 앉아있으면 인대가 붙을 거라고 했다. 이 말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의사가 다음에 한 말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운동선수가 아닌 경우, 인대가 붙어도 걷기와 일상생활밖에는 안되며, 장애인 5~6급 신청할 수 있으니까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주저앉았다. 장애인 신청을 하면 더 자신감을 잃을 것 같았다. 지금은 축구나 스키를 타다 십자인대를 많이 다치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드물어서 장애인 신청이 가능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장애인 신청을 하지 않았고, 친정엄마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16년간 비밀이었으며, 아이들도 몰랐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서 오픈했고, 시댁에서도 시어머니 장례 후(2020년 6월 이후) 비밀을 개봉했다. 이제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살기가 싫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주인이 나의 상태를 알아봐 달라고……. 주인이 자꾸 집을 비우는 것이 이상했다.

 아, 주인아저씨도 다쳤구나. 그래서 자꾸 병원에 가는구나….

이 물은 뭐지? 평상시 주인이 주던 물에 소주 맛이 나…. 이러다 소주에 취해 죽는 것이 아닐까? 설마 날 죽이려고 주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병든 잎을 다 떼어 주어 물도, 영양분도 덜 보내고 돼서 조금은 편해졌어. 이상한 물에 익숙해져 아픈 것이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붙었던 인대는 큰애가 초등학교 통학하기 편하게 이사 온 이층 집의 계단을 다니다가 늘어나서 이번에는 십자인대 재건수술을 했다. 기증한 다른 사람의 아킬레스건으로 하는 것이라, 사용수명이 있으며, 인대 고정하는 핀의 위치의 한계 때문에 되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두 번의 사고로 다친 쪽 허벅지 근육은 말라버렸고, 그로 인해 척추부터 목까지 틀어지고, 내부 장기도 영향을 받았다.    




  신기한데, 정말 신기해……. 잎도 다시 뽀송뽀송하게 예뻐지고, 꽃봉오리도 많이 피울 수 있을 거 같아. 아픈 기운은 아직 조금 남아있지만, 주인아저씨가 낳아가니까 나도 낳아갈 수 있지 않을까? 주인아저씨도 퇴원했으니까 주인이 나에게도 좀 더 신경 써 주겠지….

아, 맨날 주인이 나에게 말 걸어주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면 좋겠다. 이런 나의 나음을 주인은 알아주지 않을까? 말은 못 하지만, 맨날 신호를 보내는걸….          




  엎친 데 덮친 격일까 삼 년 전 퇴행성관절염 진단까지 받았다. 1년 이상을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하다가, 지금은 보조식품과 스트레칭으로 다시 걸어 다닌다. 나에게 태풍과 장마는 그렇게 수시로 찾아왔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자살 충동도 수없이 느꼈고, 시도도 하려 했다. 한 깔끔 떨던 내가 눈앞의 먼지를 치울 수 없는 심정은 말로 할 수가 없으며, 기존의 나를 모두 버려야 했다. 매번 발목을 잡는 것은 나에 대한 지극한 동정심과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올망졸망한 눈이었다. 아이들에게 장애인 엄마라는 표딱지를 주기 싫었고,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와 나는 서로에게 그렇게 손을 내밀며, 서로에게 마음 CPR을 해주었다. 이렇게 나의 태풍과 장마는 일단락된 듯하지만, 인대의 수명으로 인한 태풍에 항시 마음을 준비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노릇이다.     




   후후. 오늘도 소주 맛 물이군…. 그래 이걸 먹고 한 번 더 기운을 내자…. 내가 기운을 내면, 주인아저씨 때문에 정신없었던 주인도 기운이 나겠지. 봉선화 물들이려는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아자 아자…. 힘이여 내게 와라…….

분단장한 나의 모습에 주인은 꽃잎과 잎을 따서 백반을 넣고, 딸과 함께 손톱에 물을 들이겠지? 손톱에 비닐을 싸며 주인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주인에게 저런 모습이 아직 남아있었나? 신기하군……. 그때 나에게 CPR을 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나의 응급상황을 주인이 몰랐다면, 나는 그냥 흐물흐물 해졌겠지…. 한 해 밖에 못 사는 나는 아주 흔적 없이 사라졌겠지……. 요새 가끔 주인 마음이 비리비리한 것 같은데, 겨울에 오기 전 나도 주인에게 한 번 더 CPR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CPR 그게 뭐 별건가? 이상할 때 톡 집어내어 소주 맛 나는 물 주면 되는걸~      


    

오늘도 소주 맛 나는 물이나 먹을까?               


<딸과 함께 들인 봉선화 물(딸손), 오른쪽은 봉선화 씨앗>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