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물의 주인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게 좋아> 외전 - 2

by 립나




동기 중 한 명이 청첩장을 주겠다며 점심을 샀다. 동기들과 둘러앉아 식사를 하면서 나는 소윤씨와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식사 한번 같이 못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동기들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었고 나의 비밀을 잘 지켜주었다. 비밀이 지켜지고 나니 사실 내가 내심 나와 소윤씨의 관계가 알려지길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온 세상에 소윤씨의 연인이 나라는 걸 소문내고 싶었다.


식사 중에 동기누나가 소윤씨 칭찬을 했다. 소윤씨 팀에 지원 요청할 일이 있었는데 함께 일해보니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서 나에게 잘하라고 했다. 대화를 나누는 우리에게 다른 동기가 말했다. 정 주임님은 너 누나랑 친한 거 괜찮대? 내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를 못하자 동기가 자신의 여자친구는 처음에 누나를 좀 경계했었다고 설명했다. 누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다른 동기는 언니가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전 식사 자리에서 내가 누나에게 바람떡을 줬을 때 소윤씨가 기분 나빠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혹시나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소윤씨도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걸까?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정신 차리라는 것처럼 여지없이 깨졌다. 출장에 대해 대화하는 도중에 윤주임 얘기가 나오길래 나도 슬쩍 동기누나 이름을 꺼내 봤지만 다정한 소윤씨는 신경 쓰기는커녕 싱긋 웃으며 오히려 김대리님도 힘드시겠다고 걱정을 해줬다. 결국 나만 속이 탔다. 그놈의 윤주임. 하루 종일 소윤씨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소윤씨를 예뻐하는 윤주임. 나는 활기차고 표현이 넘치는 윤주임이 탐탁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회사 식당에서 마주칠 때면 소윤씨 앞자리에 앉아 크게 웃으며 식사하는 그가 얄미웠다.








출장을 가게 된 날. 나는 금요일 저녁에 소윤씨를 만날 수 없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맘 같아서는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회식 자리를 박차고 나와 1초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막상 소윤씨는 잘 다녀오라며 술 많이 마시지 말라는 말만 했다. 소윤씨가 인턴이던 때, 회식을 하면 소윤씨는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을 마시느라 바빴고 나는 그런 소윤씨를 신경 쓰느라 술을 거절하고 그 주변을 지켰었다. 소윤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술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소윤씨를 좋아해서 그런 건데. 내가 술을 많이 마실까 봐 걱정하는 소윤씨는 여전히 야속하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출장지에서 행사의 식순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는 내내 소윤씨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평소에도 연락을 촘촘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때 되면 식사 맛있게 하라던가, 지금 뭐하냐는 메시지 정도는 주고받았었는데 그날은 유독 잠잠했다. 전날 소윤씨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거라며 들뜬 목소리를 했었다. 언제나처럼 소윤씨는 태연하고 여유로웠고 나는 그게 자꾸만 서운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까지 연락이 없어서 한껏 울적해졌을 때쯤 행사장 구석에서 윤주임이 크게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윤주임이 통화를 하든 말든 관심 없었는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소윤씨를 부르는 ‘정 주임’ 소리가 들려서 온 신경이 다 그쪽으로 쏠렸다.


윤주임은 소윤씨가 퇴근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는 이것저것 부탁하더니 한참 전화를 들고 있었다. 나는 함께 회식 장소로 가자는 직원들을 먼저 내려보내고 끝까지 통화를 들었다. 윤주임은 마지막으로 콧소리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자신의 떡을 소윤씨에게 주겠다는 소리를 하며 애교를 부려댔다. 지가 뭔데 소윤씨한테 떡을 줘, 미쳤나. 나는 윤주임이 아니꼬워서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 내가 보낸 메시지에 소윤씨에게선 답장으로 이모티콘 하나만 도착했다. 소윤씨가 어떤 답장을 하는지를 따져가며 그 사소한 문제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내가 너무 찌질하고 별로였다.








회식은 끔찍했다. 분사의 본부장이 엄청난 꼰대여서 직원들에게 술을 못 먹여서 야단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살아남은 몇 사람들은 다른 직원들을 귀가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호텔에 돌아와서야 핸드폰의 잠금화면이 다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동기누나와 핸드폰 기종이 같아서 서로 바뀐 것 같았다. 그 누나는 분사에 친한 직원이 있어서 그 사람의 집에서 묵는다고 했었다. 같은 호텔이었다면 간단했을 일을 굳이 수소문해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피곤해졌다. 분사 사람들 대부분이 사옥 근처에서 살고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소윤씨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호텔 카운터에 내려와서 전화를 빌려 내 핸드폰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겨우 누나가 신세 지는 아파트 위치를 알아냈다. 누나는 많이 취해서 핸드폰이 바뀐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만나 핸드폰을 다시 바꾸는데, 누나가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소윤씨에게 전화가 온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게 전화가 온 줄 알고 무심코 받았는데 그냥 끊겼다고, 혹시 소윤씨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빨리 연락해보라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소윤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가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소윤씨는 아주 늦게 전화를 받더니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해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단순히 놀란 것 같았다. 소윤씨가 오해하길 바란 것도 아닌데 나는 조금 비참해졌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확인해봤지만 그전에 소윤씨에게서 온 연락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초조해하고 조급해하는 동안 소윤씨는 아무렇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면서 서운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그 서운함은 서서히 몸집을 키웠다. 내 머릿속에선 소윤씨와 통화하는 윤주임을 보면서 끓어올랐던 나의 못마땅함과 김대리와 통화 이후에도 평온했던 소윤씨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가로질렀다. 내가 쪼잔한 건지 소윤씨가 태평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알았다. 내가 쪼잔하고 소윤씨는 너그러운 거였다. 소윤씨는 태평해도 됐고, 태평할 만했다. 그냥 나는 점점 욕심이 난 거였다. 나에게 소윤씨가 그런 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소윤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소윤씨에게 원하는 걸 소윤씨도 나에게 원해주길 바랬다. 밤새 반복된 생각은 자꾸 나를 몰아붙였다. 아무리 소윤씨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난 소윤씨를 탓할 수 없었다. 나는 소윤씨가 언제나 옳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스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다 내가 뭔가 모자란 탓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내 표현의 부족함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뻣뻣하고 재미없는 나를 소윤씨가 항상 부드럽게 끌어주었으니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몰랐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소윤씨에게 가서 내 마음을 말하고 애정을 전하고 진심이 닿게 하고 싶었다.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첫차를 타고 출발해 소윤씨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소윤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후에 내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의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 상냥함에 또 속절없이 아쉬웠다. 밤을 새우고 아침부터 급하게 올라온 나와는 다르게 소윤씨는 침착하고 평온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평온함에 서운함을 느끼는 게 제정신인가?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친놈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윤씨를 만나고부터 나는 내가 평생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준대로 살지 못했다. 나는, 그러니까 미친놈은 그렇게 요동치는 감정을 끌어안고 소윤씨의 집에 들어갔다.


내가 얼마나 소윤씨를 사랑하는지 차근차근 말해주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가고 나는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되는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조각조각 마음을 건넸다. 내가 조각난 마음을 들고 헤맬 때면 언제나 소윤씨가 제대로 맞춰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의 조각들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그 대신 나와 마주 서서 자신의 조각난 마음을 꺼내 보여주었다. 소윤씨의 조각난 마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소윤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화가 났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마음이 벅차올랐다. 힘들어하는 소윤씨가 너무 걱정되면서도 그 와중에 미친놈답게 기쁘고 안심이 됐다.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는 상상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어깨를 떠는 소윤씨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동안의 걱정이 녹아내리면서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소윤씨를 속상하게 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가 손 쓸 수 없이 눈물을 쏟게 만드는 사람은 소윤씨가 유일했다. 그리고 난 그런 소윤씨가 좋았다. 나는 나를 울리는 소윤씨가 정말 눈물 나게 좋았다. 소윤씨를 안고 내 마음을 고백하자 소윤씨는 조금 쑥스러워 보였다. 가끔이지만 평소에는 무난하게 불렀던 내 이름도 입속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애틋했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소윤씨도 사실 사랑에 있어서는 표현이 서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피곤한지도 몰랐다. 소윤씨가 지쳐 보일 때쯤 씻고 나와서 이불을 덮고 함께 앉아 있었다. 내 한 품에 안기는 소윤씨의 모든 곳이 너무 예쁘고 부드럽고 소중했다. 소윤씨는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좀 자라고 하면서 내 손을 끌어내렸다. 나는 어제 저녁에 함께 있지 못했던 것도 아쉽고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운데, 진짜 손은 쪼끄매가지고… 그래놓고는 금방 그 병아리 같은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면서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새침하게도 들리는 그 목소리로 자기도 화를 냈었다고 말하는 소윤씨는 정말이지 너무하게 귀여웠다. 소윤씨는 그 쪼끄만 손으로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나는 졸음이 가득한 소윤씨를 그대로 눕히고 옆에 함께 누웠다.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주말 오후가 너무 행복했다.


앞으로 내가 갑자기 멀쩡해질 자신은 없다. 나는 여전히 미친놈이고 뻣뻣하고 서툴겠지만, 적어도 소윤씨 옆에 있으려면 조각난 마음이라도 잘 모아서 보여줘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소윤씨가 나를 또 울린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소윤씨는 내 눈물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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