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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Jan 02. 2023

공백을 깨는 망설임에 대하여

긴장과 강박을 흘려보내겠다는 소소한 선언


2021년 10월 꾸준히 글을 쓰겠다는 결심으로 연 브런치는 5개월가량 드문드문 운영이 되었지만 결국 작년 3월 이후로는 주인이 떠나버린 어느 곳의 별장처럼 방치되어 왔다. 별장과는 다르게 물리적 거리감이 있는 곳은 아니라서 가끔씩 들여다보았지만 그래도 글을 써 올리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몸과 머리와 마음이 모두 바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년 3월,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가면서 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쪽에 쏟아야 했다. 실제 투여해야 하는 업무 시간은 물론, 이동시간까지 하면 하루의 절반이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야근으로 하루의 2/3 이상을 쓰게 되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말에 쉴 때,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에, 이동하는 틈틈이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글자를 타이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번에야 사람에게 여력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시간만 있다면 언제든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섣부른 기대와는 달리, 나는 연속적인 일의 틈새에 작은 여유가 생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몸과, 뜨겁게 달궈진 머리와, 차갑게 식은 마음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프로젝트는 내가 생각했던 상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고 나는 그 태풍 속에서 그저 존재하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써야 했다. 범람하는 자책과 자괴감,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도 나는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시간이 지나고 결과가 나온 지금 돌아보면 나의 그 발버둥이 헛된 것은 아니었지만, 난 많은 것을 얻은 만큼 아주 많은 것들을 잃었다.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 나는 내 인생에 커다란 상실을 겪었었는데, 얄궂게도 프로젝트 중에도 나의 심정과 안정을 한 움큼씩 뜯어갈 만한 상실들이 자꾸만 발생했다. 오랫동안 차근차근 쌓아왔던 것들이 한 번에 모조리 무너지기도 하고, 하나하나 소중하게 모아 왔던 추억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빼앗기기도 했다. 내 삶의 평화를 위해 행복의 달걀들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고 조금씩 나눠 안전하게 쪼개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은 그런 나의 안전장치들을 가뿐하게 부수고 나의 의지들을 남김없이 조각냈다. 내가 힘을 받을 수 있고 쉴 수 있었던 것들을 거침없이 하나씩 모두 깨뜨리고 걷어갔다. 나는 말 그대로 황폐해졌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몸집을 불려 가는 무력함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을 계속 굴리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썼다. 얼마 남지 않은 동력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먼저 포기하게 된 것은 소박하고 무용하지만 애틋했던 나의 취미생활이었고, 그다음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이 나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글이었다. 메마른 마음에서는 꺼내 쓸 수 있는 글이 없었다. 그렇게 브런치의 글쓰기 화면을 띄워놓고 깜빡이는 커서만 멍하니 바라봐야 했을 때 나의 안구건조증은 한층 더 심해졌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에세이는 접어두고 남은 힘을 모두 긁어모아 연재 중이던 소설에 집중했다.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편씩 나오던 글이 2주에 한편이 되고, 3주, 한 달까지 그 주기가 늘어났다. 프로젝트가 마무리에 다다르면서 더욱 극심해진 과중은 나의 시간과 체력을 모두 쥐어짰다. 결국, 오늘을 기준 삼는다면 어느새 마지막 글을 올린 지 두 달을 바라보고 있다. 


나의 2022년에서 거의 괴물처럼 묘사된 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이제야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까지 길게 늘어놓은 나의 변명과 핑계를 보며 정말 그것만이 나의 글이 멈춘 이유였는가를 돌이켜보면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와중에 또 하나의 커다란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나의 '글을 쓰는 문턱'이었다. 그리 대단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돈되고, 응축되고, 깊게 고려되고, 몇 번의 퇴고를 통해 흠을 줄인 글을 쓰고자 했다. 나는 1분에 800개의 글자를 칠 수 있지만 글의 문턱을 넘을 때는 1시간 동안 고작 백여 개의 글자만을 놓고 고민하기도 일쑤였다. 그렇게 겨우겨우 글 하나를 쓴다고 해도, 게시하기 전 퇴고 단계에서 사라진 경우도 빈번했다. 이렇게 글이 더 이상 나에게 수압청소의 물줄기가 되지 않았을 때, 결국 공백이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건들과 프로젝트의 마지막 폭풍이 지나가고 여전히, 아니 더욱 황폐하게 남겨진 나지만 2023년 한 해동안 나는 나를 비옥하게 하고 말 것이라는 결심을 했다.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 거름과 비료를 뿌리고 땅을 쉬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나의 땅에서 꾸역꾸역 작물을 기르고 병약하게 자란 작물을 뒤엎어 거름으로 쓰고, 다시 도전하는 거친 방법으로 예전의 기름진 토양을 되찾고 말겠다는 나름의 비장한 결심이다. 이 글이 아마도 그 첫 번째가 될 텐데, 과연 작물이 될 것인지, 거름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땅을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허름하고 볼품없는 풀만이 자라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 단계를 모두 기록하고자 한다. 부디 이 막무가내 한 글로, 공백을 깨는 망설임이 지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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