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립나 Feb 09. 2023

가벽과 진짜 벽이 헷갈릴 때

정말 끝인지 아니면 한계인 척하는 장애물인지



살면서 벽에 부딪히는 순간들이 있다. 남들과 엄청 다르거나 특별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역시나 인생의 당사자답게 맞닥뜨리는 벽이 유독 많게 느껴기도 한다. 다들 자기 삶에서 그러하듯이. 그 벽이 슬럼프든, 슬픔이든, 우울이든, 좌절이든, 외로움이든, 답답함이든, 무력함이든 가끔 그 벽의 본질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특히나 내가 자주 마주하는 벽은 무력함이나 답답함이다. 지금의 상황이 맘에 들지 않고 어떻게든 개선하고 싶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무력할 때 무척 답답하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어쩔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그냥 받아들이자.' 사실 그마저도 못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그렇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예전의 본능이 살아나는 건지 아니면 너무나도 안주한 지금에 대한 의문이 생긴 건지 요즘은 자꾸만 스스로 되묻게 된다. '근데 정말 어쩔 수 없는 거 맞나?'


나의 여러 좌우명 중에 손에 꼽히는 문장은 바로 '버티기는 승리한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옆 손가락에 꼽힌 문장은 '미련 갖지 말자.'인 것이다. 막막한 벽 앞에 섰을 때, 과연 이 벽은 버티다 보면 무너질 벽인지 아니면 현실을 파악하고 손해를 줄여야 하는 타이밍인지 고민하게 된다. 정말 몇 번이나 고심한다. 몇 번만 더 밀면 무너질 벽을 앞에 두고 뒤돌아 갈까 봐 아쉽고, 절대 꺾이지 않을 콘크리트 벽에 포기를 모르고 몸을 부딪혀 만신창이가 될까 봐 겁나기 때문에.


세상에 그 순간들을 모두 아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 시절 탈무드에서 말하던 현자,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걸 구분해 낼 수 있는 걸까? 유별나게 후회를 기피하는 나로서는 벽을 가늠할 만한 강단과 판단력을 가지는 것이 너무 어렵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어깨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밀자는 것이었다. '인생은 짧다.'는 말처럼 시간은 넉넉하지 않고 소중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다. 나에게 큰 손해가 없는 수준에서, 낙숫물에 바위가 뚫리듯이 벽이 야금야금 무너지기를 바라며 정권찌르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예리한 판단력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배수의 진까지 치고 벽을 향해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동경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때문에 시간을 조각내 사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때로는 조금 비겁하다고 느껴지는 선택을 했지만 이런 나를 든든히 받쳐주고 격려해 주는 말들이 있다. 바로 "'매일'은 배신하지 않는다."와 '모소대나무 일화'이다. 모소대나무는 처음 땅에 심은 뒤 4년 동안은 손 한마디 정도만 자라지만 5년째 되는 해에 갑자기 자라나 울창한 대나무 숲을 만든다고 한다. 벽 입장에서는 나의 정권찌르기가 그저 토닥거리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어차피 벽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있을 거라면 쉬기보다는 매일의 타격을 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5년째에 쑥쑥 자라나는 모소대나무처럼 나의 벽도 어느 순간 갑자기 구멍이 뚫릴지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매일 움직인다. 그게 엄청나게 대단하거나 열정 넘치는 일이 아닐지라도, 가끔은 뭔가를 했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움찔거림 일지라도 그저 매일 하려고 한다. 내가 어떤 재능, 재력, 운, 환경, 열정을 가진 게 아니니 시간에 그 힘을 맡기기로 했다.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 옆 길로 새거나 밥을 구해와야 하는 일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벽 앞으로 돌아오는 것은 변하지 않을 약속이다.

이전 06화 공백을 깨는 망설임에 대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