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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Jul 16. 2023

여름아 부탁해

휴식 뒤에는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할까



  날씨가 더워지고 장마가 시작하면서 무력함이 하루를 감싸고 있다. 끼니를 챙겨 먹고, 끈적이는 곳 없도록 집안을 청소하고, 밖에 나가기 어려우니 집에서 운동을 하고, 씻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기력이 다 쓰인다. 어깨에 습기로 만든 봇짐을 하나씩 메고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상황에 도파민에 중독되어 고갈된 집중력은 말 그대로 바닥을 치고 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나를 다그치기보다는 날씨 탓을 하며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편한 시기다. 요즘 같은 여름은.

  이렇게 습기에 취약하고 더위를 많이 타지만 그래도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늘어지는 분위기만큼이나 늘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는 이유 만으로 일상의 작은 조각들마저 휴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휴가는 바쁜 삶 속에서 숨을 돌리고 여유를 찾는 기간이다. 내가 뭐 얼마나 바빴는지, 돌릴 만큼 숨이 가빴는지, 찾아야 할 만큼 여유가 부족했는지는 증명할 수 없지만 그냥 계절을 핑계 삼아 그 기분에 깊게 잠긴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지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행복들 틈사이로 촘촘하게 걱정들도 고개를 내민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를 쪄먹으면서 여름 기분을 내다가도 채소값을 걱정하고, 망고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가 '언제쯤 또 여행을 갈 수 있을까' 하며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쏟고, 베란다에 앉아 바람을 쐬며 옥수수를 갉아먹다가 문득 '내일은 좀 다른 하루를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말하다 보니 뭔 죄다 먹는 걸로만 여름을 느끼는 것 같지만 어쨌든 아주 만족스러운 그 순간들에 슬쩍 끼어드는 걱정들이 참 달갑지가 않다. 마치 휴양지에서의 마지막 밤에 느끼는 아련함 같다. 이 평화로운 휴식이 끝나고 나면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묘한 답답함과 막막함이 덥고 습한 공기 사이로 뭉게뭉게 퍼진다. 회복과 충전이 끝나면 나는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할까?


  이 지속되는 질문에 꼭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그럭저럭 맘에 드는 정답을 찾았다. 나태하고 평화로운 이 계절이 지나면 그냥 살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냥'.  휴가기간 동안 한쪽에 밀어놨던 걱정들을 하나하나 펼쳐서 면밀히 살펴보고 끙끙 앓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시 다가온 하루에 주어진 일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내키는 대로 하고, 하기 싫은 게 생기면 미루다가 정말 해야만 할 때 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때는 미워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결심을 해서 작게 사부작 거리기라도 했으면 또 격려를 해주기도 하고. 휴식을 취했다고 해서 꼭 그만큼 더 대단한 걸음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새로운 걸음이라고 해서 꼭 위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과 같은 속도라도 어쩌면 그보다 더 느려졌다고 해도 어쨌거나 나의 걸음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내 안에는 이름 없는 죄책감과 조급함이 아주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들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자라면서 학습한 것이기도 하다. 한 때는 그것들을 없애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냥 잘 다루려고만 한다. 뿌리를 뽑을 수는 없지만 매일 새롭게 자라나는 그 불편한 마음들을 잘라내고 더 올라오지 못하도록 다른 것들로 덮는다. 요즘은 여름이 그 싹을 아주 잘 덮어주고 있다. 아직 너무 더우니까, 아직은 장마니까, 여름이 지나면 이 기분을 만끽하지 못하니까. 유용한 핑계인 동시에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 같다.

그래서, 참으로 목적 없는 오늘의 이 글도 그냥 여름에게 부탁해 버리려고 한다. 이번 여름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남기고 싶으니까. 여름은 그래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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