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여름밤의 끝
요 며칠 글을 미뤘다. 이유는 없다. 그냥 나의 무기력을 용인하고 맥없이 보내는 시간을 허가했을 뿐이다. 거기서 오는 죄책감 때문인지 여름밤의 뜨거운 온도 때문인지 잠을 설쳤다. 잠을 설치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덜 마른 빨래 같은 습도를 품고 나를 스쳐갔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잘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알지 못한다기보다는 잘 보지 못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친구가 찍어준 영상 속의 나는 내가 모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버릇, 내가 모르는 말투. 말 그대로 24시간 붙어있는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누굴 알 수 있을까? 또 누군들 나를 알 수 있을까.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그런데 나는 자꾸만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나는 나를 다루는 법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적으로 늘어가는 사회성과는 반비례하게 나를 대하는 것은 점점 서툴어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뭘 하면 행복한지 알고 그날의 기분에 따른 처방을 시원하게 척척 내릴 수 있었는데 요즘은 모든 약에 내성이 생긴 것처럼 많은 것에 시큰둥하다. 요즘 나는 자꾸만 나를 달래는 걸 실패한다.
이렇게 사념이 밀려오는 무더운 여름밤에, 나르시시스트처럼 나에 대한 생각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그 수면을 박차고 밖으로 나오기로 했다. 나는 너무 자주 과거의 나를 검열하고 현재의 나를 못 미더워하고 미래의 나를 걱정했다. 막상 그 '나'는 누가 촬영해 주거나, 계속 거울 앞에서 살지 않는 이상 내가 볼 수도 없는데. 이 모든 상념들을 치우고 정말로 삶을 사는 것은 사실 간단하다.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혹은 해야 하는 일을 그냥 하는 것. 물론 말이 쉽지 가장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면, 나는 내가 행동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데카르트의 말대로라면 이렇게 사념에 뒤덮여 열대야 속에 뻐끔대고 있는 나는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존재이고 싶다. 고민하고 망설일 시간에 당장의 한 걸음을 걷고 눈앞의 작은 일에 손을 뻗는 것이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바깥의 날씨가 아니라 내 안에서 열이 퍼지는 것 같은 감각에 뒤척였다. 선풍기 바람이 스치는 피부는 차가운데 속이 뜨끈했다. 몸이 더울수록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서 잠이 들 기미가 없었다. 기억이 나는 게 신기할 만큼 먼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망설임 가득한 현재 속에 초조해하고, 아직 찾아오지도 않아 가늠할 수도 없는 미래를 실컷 걱정하던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보았다.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며칠 전의 대화를 떠올리기도 하고 당장 내일의 할 일을 정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점점 좁아지던 나의 의식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초점을 맞췄다. 여름이 끝나가는 밤, 까슬까슬한 여름 이불 위에 누워 있는 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지금. 천장을 보고 펼쳐진 내 손바닥과 내 무릎 뒤를 받치고 있는 얇은 쿠션. 열대야 속에 사념을 덮고 잠을 청하는 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잠드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하고 생각을 멈추는 것. 나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나는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