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화는 나의 투쟁으로 이룬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거나 괴로울 때 나는 가만히 누워서 저 말을 되새기며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결국에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고.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마저 버거워졌을 때, 한편으로는 고작 시간만 흐르면 나아질 문제로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게 더욱 날 괴롭게 했을 때,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 시간이 약인가? 시간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 맞나?
의문으로 시작된 길고도 깊은 생각 끝에 나는 깨달았다. 시간은 약이 아니다. 내가 약이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멈춰있지 않았다. 한없이 가라앉는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하고, 무너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의 조각들을 두 팔로 쓸어 담았다. 우울에 짓눌리고, 좌절에 다리가 꺾이고, 상실이 내 가슴에 구멍을 내고, 자책으로 몸부림치는 동안 나는 그런 나를 치유하기 위해 처절히 매달려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남에게 관심이 없고 혹시나 있다고 해도 아주 가벼운 관심이라서 그런지 그만큼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의 레이스에서 잦게 힘들어하거나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된 상태로 있는 것이 나약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정체된 채로 제자리에 있기 위해 얼마나 분전해야 하는지는 그 인생의 당사자만이 안다. 멈춰 서다 못해 뒤로 굴러 떨어지고, 서있기는커녕 나동그라지려고 할 때 얼마나 필사적으로 지금의 자리라도 지키려고 애써왔는지 나는 나의 그 노력을 안다. 나를 달래기 위해서 얼마나 수많은 밤에 내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는지, 어떻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우스꽝스러운 춤을 췄는지, 얼마나 많은 순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 가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으로 나를 격려하고, 나를 믿어주고, 나를 사랑한다고 했는지. 설령 때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것들이 아무 효과가 없고, 아무 즐거움을 주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얼마나 나를 버티게 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는지 나는 안다. 그저 시간이 흘러서 내가 괜찮아진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내가 고군분투한 결과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의 발버둥을 자랑스러워하자고. 나는 할 수 있고 해내고 있다. 우울은 지성의 산물이라고 했는데, 지성을 가진 것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로서 설 수 있고 나는 내가 있기에 두렵지 않다. 가끔은 내 인생이 이룬 게 하나 없는 것 같아도 적어도 나는 여기까지 나를 지켜왔다. 그리고 지킬 것이다. 나는 내가 있기에 불안하지 않다. 나는 오늘 밤도, 내일도 그 이후도 견뎌낼 것이다. 우울이 깊어진다면 그것들을 바닥에 쌓고 쌓아 그 위에 발을 디디고 올라올 것이다. 나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다. 나의 나약함을 몸소 느꼈기에 더욱 강할 수 있다. 나는 저절로 괜찮아진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고통과 상실과 이별과 무력함에 대해 매일 투쟁해 왔고 그것을 통해 이겨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수많은 국지전투도 이겨낼 것이다. 나는 장담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장담하고 싶다. 전투가 아무리 길어져도 난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워 이겨낼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이 있더라도 그 흔적을 품고 끝내 어떻게든 일어설 것이다.
캡틴아메리카처럼 흔쾌히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의 명대사를 슬로건 삼아 다시 한번 다짐하기로 했다. I Can Do This All Day, 난 하루 종일 할 수도 있다. 인생이 아무리 나를 망가뜨려도 나는 회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멋지게 훌훌 털고 금방 일어설 수는 없어도 더 오랜 시간 나를 고치고 또 고쳐서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다. 고친 자국들이 흉터로 남고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너덜너덜해진 나를 삶이 지긋지긋해할 때까지 나는 꼭 살아남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나의 약이 될 수 있다. 나의 평화는 나의 투쟁으로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