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내가 아는 것과 네가 아는 것을

함께 안다는 것

by 안녕마나

박춘수도 유 회장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향해 몸을 돌려세워 허리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유 회장이 그의 인사를 받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편집장을 향해 한번 손을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차를 타고 미끄러지듯 자리를 떠났다. 멀어져 가는 유 회장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서 있던 편집장은 자동차의 빨간 불빛이 저 멀리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오늘 한나절 내내 손님을 맞이했을 때보다 조금 전 유 회장의 방문이 더 고됐는지 얼이 빠져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으로 그대로 들어가려다 말고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사람처럼 다급하게 박춘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위원님께서 여기는 어떻게?“

”오늘 매일홍영 이름으로 창간호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덕구 대리님 아직 있나 해서 산책 겸 나왔는데 다 같이 계셨네요“

박춘수가 예의 바른 목소리로 답했고, 김 실장은 편집장과 박춘수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더니 박춘수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한 뒤, 사무실 입구로 향했다.

”편집장님, 그럼 이제 집에 들어가시죠. 아주 허리가 주저앉을 것 같네요. 고 주임하고 이 대리도 얼른 들어가. 주말 잘 보내고.“

김 실장이 짐을 챙기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고보영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편집장은 발길을 떼기 전 박춘수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서며 말했다.

”우리 이 덕구 대리하고 친분이 이렇게 두터우신 줄 몰랐습니다. 저희는 이제 막 마무리하고 들어가려던 길이라서,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편집장은 지쳐서 그랬는지 그답지 않은 건조한 말투로 박춘수에게 인사를 건넨 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나 역시 박춘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손짓을 건넨 뒤 뒤따라 들어갔다.

“가 보겠습니다!”

고보영이 짐을 챙기던 김 실장과 이제 막 들어서는 편집장을 향해 인사했다.

“기다려, 같이 들어가게.”

편집장이 나가려는 고보영을 향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이렇게 입고 나와서 종일 음식 서빙만 했거든요. 금요일이잖아.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들어갈게.”

오늘 낮에 오 비서관이라는 작자가 고보영에게 한 짓이 떠올랐다. 아마 편집장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 골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는 마, 10시야.”

“12시!”

그렇게 고보영이 사무실 문을 나섰다. 뒤이어 김 실장이 나섰고 편집장은 김 실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지킨 자신의 소파로 가 몸을 파묻고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이 대리, 수고했다. 들어가봐. 나는 잠깐 이렇게 있다가 가게.”

“네, 고생하셨습니다.”


사무실 문을 나서자 선선한 여름 밤바람이 불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박춘수를 찾았는데 그가 보이질 않았다.

“나 찾아?”

물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나보다. 손에 방금 한 모금 들이켠 듯한 생수병이 들려있었다.

“저녁은요?”

“먹었지. 맥주나 한 잔 할까? 축하주 살게.”

며칠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조금 야위어있었다.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랬다.

“…올리브 나무요, 감사해요.”

“아, 받았어? 야, 그럼 문자라도 잘 받았다고 하지 그랬냐? 나 안 왔으면 이거 그냥 넘어갈 판이었나본데 하하”

그가 애쓰며 농담을 건넸다. 고맙다는 몇 글자 간단히 메시지로 날리기엔 그 말이 너무 아까워, 얼굴 보며 건네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제가, 좀, 그런 싸가지가 없어요.”

내 말에 박춘수가 재미있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놀란 체를 했다.

“그런데, 진짜 형이라고 불러요?”

그가 무슨 말을 고르는지 잠시 말이 없다 입을 열었다.

“그럼, ‘춘수야’라고 부르냐? 이 싸가지 없으신 분아.”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가 목을 감듯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 못 하는 아기들도 자기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 싫어하는 사람을 구분한단다. 똑같이 꼭 안아주더라도 자기를 예뻐서 꼭 껴안는 것이면 숨이 갑갑해도 까르르거리지만, 자기를 향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가 안으면 불안해서 울어버린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것이 본능이라고 했다.박춘수가 어깨동무하는 순간 왜 하필 그런 생뚱맞은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좀 갑갑해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좋았다.

“저도 같이 가요.”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고보영이 앞을 막아섰다. 나와 박춘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라 둘다 몸을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에 고보영이 무안해졌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뭘 그렇게 놀라요. 저도 같이 가요. 근처에 괜찮은 맥주집 알아요. 늦게까지 하는 곳.”

“아, 그래요? 저는 뭐, 좋습니다.”

박춘수가 고보영의 말에 응수한 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박춘수를 향한 질투인지, 고보영을 향한 질투인지 아니면 그 둘다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야, 너는 친구도 없냐?”

생각 없이 욱하고 쏘아붙인 말에 고보영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주먹으로 내 머리를 서너 대 힘껏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고보영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나와 이제는 귓불까지 붉어진 고보영을 박춘수는 번갈아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슬쩍 웃고 있기까지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을 때 고보영이 입을 열었다.

“넌 아니야?”

“응?”

“넌, 친구 아니냐고.”

“어? 어어, 맞지. 아니 그냥 웃자고 아니 내가 싸가지가 좀…”

그때였다. 내내 지켜보고 서 있던 박춘수가 내 등을 세게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보영 씨 같이 갑시다. 가서 덕구 녀석 싸가지 좀 바로 잡아봅시다.”

그렇게 우리 셋은 고보영이 알고 있다는 맥주집으로 향했다.

“그럼 도시계획공사 그만두고 바로 여기로 내려오신 거예요?”

고보영은 나와 달리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천박한 호기심으로 캐묻는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필요한 질문을 거르는 법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보영을 아는 사람이라면 ‘걔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라는 무언의 합의 같은 것이 있었다. 고보영의 생각은 다를 수 있겠으나, 내가 볼 땐 참으로 편한 인생이었다. 살짝 취기가 오른 박춘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죠. 아니 그렇지.”

말을 놓으라는 고보영의 말이 생각났는지 박춘수는 말을 고쳐지으며 고보영에게 말했다. 고보영은 박춘수의 답에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앞에 놓인 생맥주를 한 모금 벌컥 들이켜며 대꾸했다.

“그렇게 다들 못 들어가서 안달인 회사를 왜 과장까지 달고 나오셨대요. 아깝게”

고보영의 말에 박춘수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그게…들어가기 전엔 못 들어가서 안달인데 들어가고 나면 또, 못 나와서 안달이거든.”

“안달일 건 또 뭐에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거지.”

“하하 맞네. 그런데 지금 보영 씨도 묻잖아. 왜 그 좋은 직장 그만뒀냐고. 하하”

“아, 그런가.하하. 그렇네요. 그럼 안달하는 대신 그냥 나오신 거구나. 그럼 뭐,멋있는 거네요.”

“멋있긴, 나 같으면 그만두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 회사 잘 붙어있겠다. 연봉도 엄청 세고, 거기 들어가면 부동산 부자 된다는 말도 있던데.”

나의 말에 고보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아까 그 손님은 누구셔? 근사하던데.”

박춘수가 말하는 이는 유 회장인 듯했다. 고보영이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며 물었다.

“에? 유복환 회장을 모르세요? 행복군민위원회도 하시면서 어떻게 유 회장을 모르세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행복군민위원회랑 그분이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고보영의 말에 박춘수 대신 되물으며 멀뚱한 표정을 짓자 고보영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한번 웃더니 팔짱을 끼었다.

“덕구 대리님도 몰라? 아니면 내가 아는 게 이상한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아빠는 늘 집에서 회사 일이며, 여기 홍영에서 듣고 본 이야기를 중계하듯이 말하거든. 마무리야 늘, 그러니까 어디에 가서 처신을 잘해라, 누구누구 눈에는 걸리지 말아라, 그 사람은 좋다, 어떤 놈은 나쁘다 뭐 그런 이야기들이지만.”

“그런데 저번 전체행사에서도 그렇고 발족식에서 임명장 나눠줄 때도 그렇고 그분은 행복군민위원회 위원이 아니던데?”

나의 말에 고보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더니 건너편에 앉아있는 우리 둘을 향해 몸을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행복군민위원회가 유 회장 작품이잖아. 그 사람이 만든거야. 그리고 거기 위원들 웬만하면 다 유 회장하고 친분이 있거나, 이해관계에 있다고 그러던데.”

문득 일전에 유 회장이 홍영대통령이라 불린다던 김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나는 위원이 어떻게 된거지? 난 그 사람 얼굴도 오늘 처음 봤고, 이름도 처음 들었는데.”

박춘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고보영도 그 답은 모르는지 몸을 다시 뒤로 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게요. 아저씨는 어떻게 되셨대요?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춘수 형 빼고는 다들 홍영 사람들이라 살다 보니 유 회장하고 인연이 생긴 거 아니야? 유 회장이 심어놓았다기보다.”

춘수 형이라는 호칭 때문인지 아니면 내 분석이 날카로워 그랬는지 박춘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맥주잔을 들어 보였고, 고보영은 내 말이 꽤 일리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잔을 부딪쳐 한 모금 들이켰다.

“아까 그 권세진 과장이라는 사람하고는 친하셨어요?”

고보영이 뻥튀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박춘수가 말을 고르자 고보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두 분, 뭔가 있죠? 아무리 봐도 이상했어.”

거침없는 고보영의 말에 쟤는 어째 거르는 말도 없이 저렇게 대 놓고 물을 수가 있는가하고 생각하며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권세진과의 관계가 궁금하면서도 정작 박춘수에게 묻지 못한 채 고보영의 질문 뒤에 숨어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을 깨닫자 홀로 슬쩍 무안해졌다.

“뭐가 이상했는데?”

박춘수가 되묻자 고보영은 취기가 올랐는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게, 권세진 과장이라는 분은 엄청나게 반가워하는데 아저씨는 정말 하나도 안 반가워했잖아요. 아, 너무 웃었나.”

고보영의 말에 박춘수가 나를 돌아보며 자기가 정말 그랬냐고 묻는 듯 눈썹을 치켜올려보였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 어색해 보이기는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을 끊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번에 첫 분과회의 때, 전체회의장으로 가다가 권세진 과장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와서 묻더라고요. 박춘수 과장님, 아니 위원님 잘 지내시냐고. 그러면서.”

나는 박춘수가 너무 자기 위주라고 말했던 권세진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말을 박춘수에게 옮기자니, 고자질 혹은 이간질처럼 느껴져 망설이는데 고보영이 끼어들었다.

“그 사람이 뭐래? 이상한 말 했어?”

박춘수 역시, 이 순간 내가 망설일만한 어떤 말을 권세진이 했다는 사실에 자못 흥미로워졌는지 내게로 시선을 묶어둔 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니, 이상한 말은 아니고, 뭐랄까. 걱정하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데 내 느낌에는 걱정은 아닌 것 같았고. 어쨌든 내 느낌에는. 여튼 춘수 형이 그러니까, 너무 자기 식이라고 그래서 잘 어울릴까 걱정된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나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박춘수를 쓱 쳐다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까, 권세진 과장이 그때 아저씨한테 이제는 달라지셨길 바란다면서, 혼자 사는 세상 아니지 않느냐고 그러지 않았어요?”

오늘 작정을 했는지 고보영은 맥주를 한모금 크게 들이키고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박춘수는 나와 고보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숙였던 몸을 기지개를 켜듯 펴며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두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아주 많았네. 회의는 안 듣고 나랑 권세진만 보고 있었나. 하하. 그래서, 고 주임님하고 덕구가 보기에도 나는 세상 혼자 사는 사람으로 보이나.”

문득 그의 가벼운 질문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로 산다는 것은 혼자 산다는 것과 참으로 다른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둘이 마치 같은 말인 것인 양 자주, 어쩌면 습관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내가 나로 살고 싶어지는 순간에, 그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맞서야 한다면 우리는 ‘그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잖아’라며 나로 살기를 쉽게 내려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박춘수는 아니 춘수 형은 비록 고작 두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낸 것뿐이지만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나’로 사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위해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았으며,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시선에 마땅히 맞설 줄 알 뿐만 아니라, 자기 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에 다른 이의 삶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 사는 이는 다른 이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으며, 그러기에 어쩌면 사람들은 박춘수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경계하고 또 좋아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모든 생각과 말을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잘 살고 있어요.”

내 표정이 너무 진지했는지 박춘수는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죽자고 한 말은 아닌데 그런 표정으로 말을 받으면 내가 너무 무안하잖아. 하하”

“그러니까, 권세진 과장하고 친한 사이가 아니죠? 친한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지. 상대가 진짜로 걱정되면 그냥 곁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바라봐 주면 될 일을. 아니지, 친하면 절대 그럴 수 없지.”

고보영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박춘수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오묘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그렇게 뇌까리고 있었다. 취한 것이 분명했다.

“분명한 건,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선배라며 날 잘 따랐으니까. 그런데 뭐, 이런저런 일이 얽히면서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거지. 그것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 사람 일이라는 게. 왜 알아야 할 것은 왜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지. 여튼 나한텐 그런 사람이야.”

잔에 남아있던 맥주를 한입에 털어놓으며 박춘수는 쓸쓸하게 웃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떠오르려는 생각을 취기로 누르려는 듯 그는 맥주 한 잔을 더 시켰고, 그 틈을 참지 못하겠는지 내 맥주잔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오동나무 각목 100개는 어디에 쓴 거예요?”

박춘수의 힘들어하는 표정을 지켜보기가 힘들어 나는 뜬금없이 떠오른 말을 토하듯 내뱉었다. 그가 잠시 멀뚱멀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이해했다는 듯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하하. 엮어서 침대 만들었는데.”

“네? 침대요?”

“응,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어. 이게 내가 원하는 높이, 원하는 너비로 조절이 가능하잖아. 그리고 조형적으로도 단면도 예쁘고 나무 냄새도 좋고. 왜 그 경찰친구가 또 물어보든?”

일전에 진우가 박춘수가 목재상에 주문했다던 그 각목의 용처를 묻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아뇨.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진우? 그 경찰친구가 왜 아저씨에 대해서 물어? 개인적인 건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고보영이 발그레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진우가 오동나무에 관해 물었다며 박춘수에게 처음 이야기해 줬을 때 박춘수가 누가 쓰임새를 물어올지 궁금했는데 흥미롭다는 듯 답했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마땅한 답을 찾고 있는데 고보영이 말했다.

“하긴, 아저씨한테는 왜 이렇게들 관심이 많아요? 우리 아빠도 아저씨가 목재상에서 각목 샀다는 걸 알고 있던데. 크크”

고보영의 말에 박춘수가 정신이 드는지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가볍게 그녀에게 물었다.

“고 대표님이? 내 행동이 그렇게 튀었던가.”

박춘수는 그렇게 일부러 묻고 고보영의 답을 기다렸다. 고보영은 돌연 피식거리더니 몸을 우리 쪽으로 숙여놓으며 낮게 말했다.

“아저씨도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오히려, 누가 아저씨한테 관심 있는지 궁금하신 거 아니었어요?”

고보영의 말에 박춘수와 나는 순간 멈칫했다. 뒷걸음에 쥐를 밟은 격이라기에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물론 박춘수가 기능적이고 조형미 있는 침대를 만들기를 원했던 것도 사실이겠으나, 누가 그에게 관심을 두는지 흥미로워한 것도 사실이지 않았던가.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보영은 싱긋 웃으며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아세요. 우리 아빠는요, 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집에서 거의 다 해요. 물론 중요한 이야기야 말 안 하는 게 있기야 하겠지만요. 여튼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그렇게 미주알 고주알 다 말하는 건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렇대요. 소식지 망할 뻔했을 때 우리 엄마랑 결혼하면서 외할아버지가 돈을 대 줬었는데 그 이후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잣말처럼 집에서 다 말하기 시작했대요. 이게 엄마한테 보고한다는 느낌이 아니거든요. 아빠는 자기가 밖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는지, 높은 사람들과도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그런거 광고하는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막 그렇게 떠벌리면 듣기 싫어도 내버려 두라고, 응수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런데 크크크. 엄마도 모를 거야. 나는 아빠가 집 안에서 그렇게 내뱉은 말을 다 듣고 나면, 집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해가 될 때가 있더라고요. 웃기지 않아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던데 내가 박쥐인 줄 모르는 거지. 나는 새이기도 하고, 쥐이기도 하거든요. 전 다 들어요. 크크크”

그녀의 말에 나도 박춘수도 이렇다 할 대꾸를 못 했다. 아니, 대꾸를 못 했다기보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녀가 그런 우리 둘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러니까 아저씨는 여기에 왜 내려오셨는지 직접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안팎에서 들은 말 짜 맞춰서 혼자 알아내기 전에. 아셨죠?”

고보영은 핸드백을 주섬주섬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몸을 돌리려다 비틀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박춘수가 나를 보더니 눈짓하며 말했다.

“네가 잘 바래다 주고 와. 나는 좀더 마시다가 갈게. 내가 사는 거니까 그냥 곧장 나가는거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고보영은 내가 따라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틀거렸다가 자세를 바로잡기를 반복하며 위태롭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집으로 향했다. 나는 뒤에서 따라 걷다가 지나가는 어떤 여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슬쩍 흘기는 바람에 얼른 고보영의 곁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밤바람을 쐬자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그녀가 아까보다 또렷해진 눈망울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바래다 주게?”

“응, 왜?”

“너 우리집 알아?”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같이 걷는거야. 너네 집은 너가 알겠지.”

그녀는 내 말에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소 차갑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표정이 한결 많아진 그녀를 보고 있자니 공연히 슬쩍 기분이 좋았다. 고개를 살짝 숙여 땅을 보며 걷는 그녀의 깊어진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오 비서관이라는 작자가 그녀에게 한 짓이 떠올랐다.

“아까 말이야. 못 도와줘서 미안해.”

“응? 무슨?”

“아까 그 추태 부리던 인간 말야. 오 비서관인가 뭔가 하는.”

“아, 그거…”

그녀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싶어 아랫 입술을 깨무는데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난, 고맙던데.”

“응?”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랄까. 네가 날 믿는 게 느껴졌어. 내가 알아서 잘 해결할 거라고 믿고 지켜본다는 게…”

그녀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 그랬다. 그녀가 말이 없는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야. 나는 내가 지켜. 우리 엄마가 그랬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도 습관이라고.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늘 곁에 있을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무섭고 힘들어도 자기 자신을 자꾸 지켜 버릇 해야 한다고 했어.”

엄마가 되면 제3의 지능이 생기는 것인지, 엄마들이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그토록 중요한 이야기를 잔소리처럼 가볍고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보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이 위급한 순간에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엄마의 그 말을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여기에서부터는 혼자 갈게. 카카오 택시 불렀어.”

“괜찮겠어?”

내 말에 고보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하마터면 ‘예쁘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줄 알고 혀를 꾹 깨물었다. 저 멀리 택시가 우리를 향해 불빛을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고보영은 손을 들어보였고, 동시에 뒤에 있던 나를 바라보았다.

“나, 걱정 돼?”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 그녀 앞에 선 택시에 재빨리 올라타고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멀어져 가는 택시의 붉은 빛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보영 님께서 19바4023에 탑승하셨습니다.’

메시지를 받자 나는 그게 뭐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수요일 2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