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사무실은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축하 전화로 편집장의 전화기는 쉴새 없이 울려댔고, 김 실장은 줄지어 배달되는 축하 화분의 위치를 정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화분을 어디에 세워둘 지는, 그 화분에 심긴 꽃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그 화분을 보낸 이와 메시지가 쓰인 리본이 결정한다는 사실도 새롭게 배웠다. 가장 좋은 자리에는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 유복환 회장’이라는 리본을 단 대형 화분이 놓였고, 그 뒤로는 그보다 작은 화분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그 커다란 화분이 모든 볕을 독차지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배치를 보고 있자니 이제는 하다 하다 식물마저 누가 보냈는지에 따라 광합성 부익부 빈익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김 실장의 그러한 일 처리에 편집장은 역시 김 실장밖에 없다며 만족스러운 낯빛을 감추지 않았고 김 실장은 ‘김 실장밖에 없다는 그 말이 이제는 무섭네요’라며 그녀 특유의 재치를 섞어 편집장이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선을 지켜가며 자기 할 말은 했다.
“어머, 고 주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어머머!”
김 실장의 호들갑에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여닫이로 바뀐 사무실 문을 열고 고보영이 들어서고 있었다. 살굿빛이 도는 트위드 반소매 원피스에 분홍빛 구두까지 신고 나타난 그녀는 평소와 달리 머리를 틀어 올렸고, 그간 긴 머리에 감춰져 있던 목선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보영은 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김 실장의 호들갑에 응수했다.
“편집장님이 갖춰 입으라고 하셔서 입은 거니까, 아무 말씀 말아주세요. 사라지고 싶어지니까요.”
그녀의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고보영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온화하게 웃어 보였고 고보영도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시선이 갈팡질팡해지는 바람에 나는 아예 그녀를 보지도 않고 한쪽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매일홍영’이라 이름이 박힌 첫 소식지를 정렬하는데 온 정신을 쏟아부으려 노력했다.
“와, 기분 이상하네. 진짜 비둘기소식지하고는 차원이 다른 소식지다. 너무 예쁘네.”
옷 색깔 탓이었는지, 꽃송이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 입으로 고보영이 ‘예쁘네’라는 말을 내뱉자 나는 내가 한 말도 아니면서 공연히 무안해져 그녀를 돌아보려다 말았다.
“고 주임님이 편집 디자인을 잘해서 그렇지 뭐. 기분 좋겠다.”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에게 건넨 말이라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생글거리는 미소가 느껴지는 것 같아 이유 없이 뒤통수가 찌릿찌릿했다.
“이 대리님아! 대리님 앞으로도 화분이 왔네?”
김 실장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낯선 나무 한 그루를 품은 제법 큰 화분이 사무실 입구에 놓여있었다. 누군가로부터 화분이든 꽃이든 살아있는 무언가를 선물 받아보기는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축하 리본 대신 나뭇가지 하나에 나무 집게로 집어놓은 작은 편지봉투가 걸려있었고 그곳엔 ‘매일홍영 이덕구 대리님께’라고 적혀있었다. 엄마가 축하 난이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내게 물었을 때, 남도 아니고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 무슨 화분이냐며 말을 무질렀건만 기어이 보냈구나 싶어, ‘막상 받아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군, 아니 심지어 꽤 괜찮군’이라 생각하며 봉투를 열자 그곳엔 뜻밖에도 이렇게 적혀있었다.
‘올리브 나무 꽃말이 평화라고 하더라. 곁에 두고 좋은 기운 받으면서, 너도 같이 번창해라 – 춘수 형.’
“부럽다, 누가 보낸 거야?”
언제 곁에 와서 섰는지 고보영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고보영에게 편지를 보여주려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편집장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얼른 편지를 접어 얼버무렸다.
“아, 친구. 아니 친구들이 돈 모아서.”
“좋은 친구들이네, 나무가 제법 비싸 보이는데. 무슨 나무래?”
김 실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박춘수가 보낸 나무를 놓을 자리를 만드려는 듯 이리저리 화분을 옮겨놓으며 물었다.
“아, 올리브 나무래요. 그런데 김 실장님. 그런데…이 나무는 제 자리에 놓아도 될까요? 거기 자리도 좁고, 또…”
“그래, 안 그래도 여기 자리 좁다. 덕구 자리 옆에 놔둬. 생각 잘했다.. 이 대리 자리도 저쪽 블라인드 올리면 해가 잘 드니까, 괜찮겠다.”
눈치 빠른 김 실장 덕에 나는 처음으로 내 나무를 갖게 되었다. 나는 박춘수가 보낸 작은 편지를 양복 안주머니에 곱게 찔러넣었다. 왼쪽 가슴 위에 ‘춘수 형’이라는 말을 얹자, 내 마음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던 뿌리가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편집장의 환영사와 그간 비둘기소식지가 걸어온 길, 그리고 매일홍영의 비전에 대한 장광설이 끝나고, 김 실장이 야심 차게 사들인 회의 테이블 위에 잔치 음식이 차려졌다. 일찌감치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한 이들이 잔칫집 흥을 돋웠고, 조금 늦게 도착한 이들이 먼저 온 이들과 바삐 악수 인사를 나누자 사무실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나와 고보영은 음식점 종업원이라도 된 듯 무섭게 떨어지는 음식과 술을 나르느라 정작 우리 배는 채우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츄리닝을 입고 오는 건데, 다리 아파 죽겠다’라는 그녀의 말에, 대학 졸업식 이후 처음 갖춰 입은 양복바지에 고추장 자국이 얼룩진 모양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허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하루뿐이니 오늘만 넘기자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벼이 했다. 그때였다.
“어이, 아가씨, 여기 막걸리 한 병만 더 줘!”
살짝 불콰해진 얼굴로 예순 남짓한 사내가 고보영을 향해 외쳤다. 비록 사무실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지만, 그의 말은 내게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나는 불쾌와 당황으로 범벅이 된 고보영을 손짓으로 막아 세우며 그를 향해 말했다.
“네,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나를 한번 쓱 돌아보고는 다시 고보영을 향해 말했다.
“에이, 젊은 아가씨가 가져다줘야 술맛도 맛인 거지, 예쁜 아가씨 부탁합니다, 허허허”
고보영이 어금니를 꾹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내 눈에서도 불길이 일었다. 그 순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향해 다가서려는 순간, 고보영이 성큼성큼 그의 앞에 섰다.
“사과하세요.”
“뭐야?”
고보영의 한 마디에 남자의 표정이 아무렇게나 일그러졌다. 고보영은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성추행으로 신고해 버리기 전에 사과하세요.”
“뭐? 뭐야? 신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살짝 몸을 뒤로 빼더니 다시 마음을 다잡은 듯 얼굴을 무섭게 구기고서 그녀를 향해 대거리했다. 왁자지껄했던 사무실의 온갖 대화소리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방금 젊은 아가씨가 가져다줘야 술맛이 있다면서요. 예쁜 아가씨라면서요!”
“참내, 지금 칭찬했다고 이러는 거야? 젊고 예쁘다는 게 성추행이면 이 세상에 성추행 아닌 게 어디 있어? 참나, 요즘 어린 것들은 너무 예민해서 탈이야. 에이 술맛 떨어지게.”
그는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리에 걸어두었던 양복 재킷을 툭툭 털어 왼팔 위에 걸치고는 더러운 꼴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몇 번 차더니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입으로는 무언가를 계속 시부렁거렸다. 그러자 고보영이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를 앞질러 가더니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그나마 사과할 기회를 드리는 걸 고맙게 생각하세요. 바로 경찰서에 데리고 갈 수도 있는데 여기 오신 손님이니까 그나마 마지막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어서 사과하세요.”
“뭐야? 뭐 이런 미친 게…”
그가 오른손으로 비키라는 듯 그녀를 옆으로 밀치려는 순간이었다.
“오 비서관, 무슨 일이야?”
편집장이었다. 어느새 조용해진 사무실의 모든 눈과 귀는 고보영과 그 남자에게로 쏠려있었다. 편집장이 중재를 시작하려 하자 이제 좋은 구경은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몇몇은 자신들의 대화로 돌아갔다. 편집장이 그를 ‘오 비서관’이라 부르자 그제야 자신에게 몰려든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며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편집장을 향해 말했다.
“직원 교육 좀 제대로 해. 잔칫집 빛내러 와준 손님한테 말이야, 자기가 괜히 예민해져서 생사람 잡고 말이야.”
그의 말에 고보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쏟아내려는 순간, 편집장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보영아, 무슨 일인데.”
우습게도 편집장의 이 간단한 물음에 당황한 이는 그 남자였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귓불까지 벌개져서는 편집장과 고보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보영이? 둘째딸 그 보영이? 아니 걔가 이렇게 컸어? 아이고, 못 알아보겠네.”
순식간에 넙죽 엎드린 그의 모습에 고보영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편집장에게 말을 시작하려는 순간 그 남자가 말을 가로챘다.
“아이고, 내가 이거 실수를 했네. 고 대표 딸인 줄은 몰랐지. 내가 술에 취해서 말실수를 좀 한 것 같아. 뭐,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 말은 아니긴 한데 요즘 세상이 우리 때 하고는 아주 다르니까. 네가 보영이였구나? 허허.”
가여우리만치 초라한 모습으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그의 속삭임같은 부드러운 말투와 이쯤이면 됐다는 편집장의 눈빛과 표정에도 고보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오 비서관님이라고 하셨죠.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요, 제가 고만덕 대표 딸이라서 미안하실 게 아니라 원래 어떤 여자에게든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술김에 실수한 게 아니라 잘못하신 건데 마침 술을 드셨던 것뿐이죠. 어서 사과하세요.”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내어놓을 때마다 그 남자의 표정은 일그러졌다가 울상이 되기를 반복했다. 편집장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는지 불쾌한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그 남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자네 말대로 요즘 세상이 조심해야 할 게 많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송 의원님이 아시면 걱정하실만한 일이긴 하겠어. 어렵게 초선 다셨는데.”
그의 말에 오 비서관이라는 자가 고 대표를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일순간 상황 파악을 마친 얼굴로 고보영과 편집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에서 편하게 어울리다가 보니까 그랬나 보네. 이거 자네 딸한테 내가 큰 실수를 했네. 미안하네. 내가 다음에 술 한잔 살게. 저기 손님들도 있고 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나 가네.”
그는 잔뜩 표정을 꾸민 얼굴로 편집장과 고보영을 다독이며 사무실을 나섰고 그를 따라 서려는 고보영을 편집장이 막아섰다.
“이제 그만해라. 됐어. 저놈 며칠 동안 불안해서 잠 못 잘 거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어느 정도 뒷정리가 마무리되자 우리 네 사람은 회의 테이블에 모여앉았다.
“다들 고생했어.”
편집장의 말에 김 실장이 잔뜩 지친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지금 그 한 마디로 어물쩍 넘어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보너스라도 주세요. 사람 쓰자니까 기어이 우리끼리 그냥 하자고 하셔서 다들 좋은 옷 차려입고 이게 뭐예요. 서빙하고 손님 대접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뭐, 일을 오늘 온 손님들이 해요? 매일홍영 일은 우리가 하는 건데 우리도 대접 좀 해 주세요.”
김 실장의 말에 편집장이 무안한 듯 입맛을 다시더니 나와 고보영을 한번 쓱 봤다가 다시 김 실장을 향해 능글맞게 웃었다.
“에이, 오늘 행사한다고 돈을 얼마를 썼는데. 어이, 김 실장. 그럼 내가 월요일에 회식으로 문어숙회 쏜다!”
편집장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식지 발간 일에 그간 사무실 리모델링까지 하느라 애쓴 김 실장에게 내심 미안한 눈치였다. 이를 그냥 넘길 리 없는 김 실장이었다.
“그럼 문어 숙회 사 먹을 돈을 주세요. 이거 리모델링한다고 주말에도 일하느라 시댁에 애들 맡기고 그래서, 남편하고 시댁에도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란 말이에요. 식구들하고 같이 사 먹게 그 돈 주시면 되잖아요.”
김 실장도 처음에는 그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인 듯했지만,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지며 제법 진지한 투가 되었다. 편집장도 김 실장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뒤로 물렀다.
“알았어, 그럼 내가 세 사람한테 10만원씩 쏜다!”
환호를 예상했는지 편집장은 유쾌한 표정으로 오른손 집게손가락까지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올리며 말했지만 김 실장이 반색하며 박수 칠 틈도 주지 않고, 이번에는 고보영이 끼어들었다.
“김 실장님하고 우리하고 보너스가 같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고보영의 말에 편집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며 그의 콧방울이 씰룩거렸다.
“김 실장님 20만원, 저희는 10만원씩 주세요. 오늘의 특수근무수당은 그렇게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김 실장님이 오늘 진짜 고생도 많이 하셨고.”
말을 마친 고보영의 얼굴 위로 승리감 같은 묘한 유쾌함이 스쳐 지나갔고, 편집장의 얼굴은 그녀와는 반대로 제대로 당했다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김 실장이었다.
“편집장님, 자식 정말 잘 키우셨어요. 하하하 그럼 문어숙회 배 터지게 잘 먹겠습니다. 하하하하”
편집장은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몇 번 치더니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편집장 모습에 우리도 아주 오랜만인 듯 웃음을 터뜨렸다.
“보기 좋네.”
별안간 날아든 낯선 목소리에 우리 넷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사무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은발, 적당하게 햇볕에 그을려 윤기가 흐르는 피부, 하얀색 피케셔츠와 회색빛 캔버스 천으로 만든 허리띠, 흐르는 듯 무겁게 툭 떨어지는 하얀 면바지, 하얀 가죽 로퍼 그리고 왼손에 찬 롤렉스 시계. 그였다. 행복군민위원회 발족식에서 박춘수를 향해 ‘저 새끼는 누구야’라며 낮게 속삭이던 그 남자다. 처음에 봤을 때는 60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70대 초중반은 되어 보였다. 다만 온몸에 흐르는 듯한 윤기 덕에 그는 본래 나이보다 훨씬 더 활력 있고 젊게 보였다.
우리 넷은 모두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롤렉스 남자를 봤다면 누구라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친절하고 온화하며 경위가 바른 어른으로 보였으나 동시에 어딘지 섬뜩했다.
“아이고, 유 회장님께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언제 뛰쳐나갔는지 편집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롤렉스 남자를 향해 두 손을 내밀며 허리를 깎듯이 숙여 인사했다.
“내가 직원들끼리 뒤풀이 하는 자리에 온 것 같네. 오늘 낮에 오려고 했는데 오래전부터 잡아둔 라운딩이 있어서 못 왔어. 우리 고만덕 대표님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이렇게 좋은 변화 일구시는데 내가 와 보지도 않는 건 도리가 아니지.”
편집장은 감격이 북받쳐 오르는 표정으로 숨을 한번 가다듬더니 막 중요한 것이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일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인 대형 화분을 가리켰다.
“회장님께서 주신 화분도 잘 받아서 저렇게 햇빛 잘 드는 자리에 놓아뒀습니다. 바쁘실 텐데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원, 자리가 영 마땅치가 않은데 여기 앉으시겠습니까? 혼자 오셨습니까?”
편집장은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그에게 길을 내어주었고 롤렉스 남자는 웃으며 김 실장과 고보영, 나를 향해 한 번씩 눈인사를 건넨 뒤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얹어놓자 그의 손목에 감긴 시계가 그의 눈보다 더 반짝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유복환입니다. 반갑습니다.”
그가 인사를 건네자 편집장이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김인숙 실장입니다.”
“김 실장님은 내가 알지, 이거 새 단장한다고 김 실장님이 고생 많았을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고보영에게로 옮겨왔다.
“안녕하세요, 편집 디자인 맡고 있는 고보영 주임입니다.”
“제 딸입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편집장은 고보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아, 그 똘똘하다는 둘째 따님이시구먼. 반갑네, 딸을 둔 아버지 마음이야 다 그렇겠지만 이렇게 곱게 키워서 시집 보내기 아깝겠어. 뭐, 요즘에야 세상이 변해서 딸 가진 부모가 큰소리친다는 말은 있지만, 하하. 결혼 늦게 해, 일찍 해 봐야 좋을 것 별로 없어.”
그렇게까지 웃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편집장은 뭐가 재미있었는지 한바탕 시원하게 웃었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 회장도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지역소식 취재 맡고 있는 이덕구 대리입니다.”
나의 소개에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듯 턱을 약간 치켜든 채 가늘게 뜬 눈으로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편집장은 조바심이 일었는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회장님, 왜 그러시는지…”
그제야 유 회장은 표정을 풀며 환히 웃었다.
“아, 내가 누구랑 헷갈렸나 보네, 하하. 반가워요.”
김 실장은 어느 틈에 자리에서 일어났었는지 쟁반 위에 식혜와 주전부리를 조금 차려 내왔다.
“회장님, 사무실에 VIP 오시면 쓰려고 산 그릇인데 오늘 회장님께 처음 쓰네요. 하하”
편집장은 글자 그대로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으로 그런 김 실장을 바라보았고 유 회장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웃었다. 그는 그녀가 내온 식혜를 한 모금 마시더니 컵을 내려놓고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가볍게 탁 치며 말했다.
“자, 이제 얼굴들 봤으니까 가 봅니다. 우리 마누라한테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거든. 얼른 들어가야지. 아무튼 오늘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유 회장은 우리를 차례로 바라보더니 편집장 어깨를 툭툭 치며 사무실 입구로 향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편집장을 위시하여 고보영, 김 실장, 내가 차례로 유 회장을 따라서 사무실 밖까지 나섰다. 사무실 바로 앞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유 회장은 들어가 보라는 손짓으로 우리를 물렀고 편집장은 자리에 멈춰서서 유 회장이 운전석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망부석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어? 박춘수 씨! 덕구 대리님 보러 오셨어요?“
고보영이 어둠 속 어딘가를 향해 반갑게 말했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박춘수가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유 회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고보영의 말을 들었는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박춘수가 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편집장은 그런 유 회장과 박춘수, 그리고 고보영과 나를 차례로 번갈아 보며 유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박춘수는 우리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유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분노 어린 조소가 조용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1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