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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May 17. 2020

푸릇 8남매 식물로그 카메오편: 폴라포 향기 라일락

길거리에서 마주한 오랜만의 라일락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무슨 연유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날은 하교가 늦었다.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고 공 차는 아이들조차 없었다. 그렇게 혼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달큰한 향기가 얼굴을 확 덮치는 것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바람이 불어온 곳을 찾았는데

도무지 어디에서 불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장난처럼 다시 향기가 훅 불어왔다.

정문 쪽이었다. 종종종 달려가니 그곳에 커다란 라일락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포도처럼 송알송알 열린 라일락꽃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늦은 오후볕이 별처럼 부서져 반짝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폴라포 향기..'


폴라포는 내가 좋아하는 포도맛 아이스크림이었다. 포도쥬스를 얼린 것 같은 시원하고 달큰한 아이스크림.

이리저리 흘리다 보면 손가락이며 입주변이 끈적거렸지만 향기가 어찌나 달달한지 그것 하나 입에 물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에 가도 금방 도착하곤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마주하고 코로 라일락 향기를 그렇게 한참 킁킁대는데,


"뭐하니?"


담임 선생님이었다. 마치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음이 되었다.


"라일락 향기 맡니? 향기 좋지?"


보통 영화나 드라마라면 선생님이 멋지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는 대목이나

나의 현실은 폴라포보다도 달달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맡고 있지마, 라일락 향기가 너무 좋아서 내내 향기 맡다가 정신 나간 노인 이야기도 있단다"


그렇게 선생님은 싱긋 웃으며 가던 길을 갔다.

농담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고 했다. 웃기거나 교훈적이거나.

선생님의 말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거나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겠으나

나는 그 말을 듣고 라일락 향기를 맡고 싶은만큼 오래도록 맡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슬퍼졌다.


라일락 향기가 좋아 나무 아래에서 그 향기를 원하는만큼 맡더라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생각보다 한참 이후였다.

그리고 잊었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길가에서 라일락을 만났다.

선생님의 빈말에 마음 졸이던 꼬마가 나는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렇게 보면 선생님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 것은 맞다. 피식- 웃음이 났다.

선생님의 농담에 30여 년이 지나 웃는다.


포도맛 아이스크림 폴라포 향기가 난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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