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 화이팅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려고 하니 타자를 치는 손이 어색하다. 한여름 내내 하드 마냥 녹아내려 있다 찬 바람이 불자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추워지는 것이 한반도의 기후고, 이런 관용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아, 수능 냄새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한민국 초중등 교육 12년 과정이 고작 이 시험 하루를 위한 것이라는 우스개 농담이 있을 정도로 수능은 한국인에게 중요하다 여겨진다. 물론 그조차도 몇 년이 흐르면 고작 인생에서 시험 한 번 본 것이고 생각보다 별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당장 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게는 먼 소리이다.
그렇게 중요한 날,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먹게 되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수능 도시락이다. 메뉴는 천차만별. 소화하기 쉬운 메뉴를 싸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런 날이니 더욱 특별하게 팔첩 반상을 차려오는 사람도 있다. 왜, 있지 않은가. 으리으리한 도시락으로 옆자리 사람을 기선을 제압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를. 나는 무엇을 싸갔냐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 두부 부침에 소시지 야채 볶음, 쌀밥에 콩나물국을 싸갔다. 실전을 대비한다고 며칠 전 똑같은 메뉴를 도시락에 담아서 먹일 정도로 철저한 엄마의 메뉴였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있다면 보온 도시락의 뚜껑을 열지 못한 것이었다. 분명히 살짝 닫았는데 연약한 나의 손목과 악력은 그것마저 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침을 잘 먹지 않는 내가 아침밥을 챙겨 먹은 데다 쉬는 시간에 초콜릿을 챙겨 먹어 배가 고프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여유롭게 영어 영역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아, 내가 수능을 잘 쳤냐고 물으신다면… 노코멘트다.
그때야 친구들과 함께 수능 도시락 메뉴를 얘기하며 나는 성적은 글렀으니 도시락이라도 이겨야겠다며 치킨 한 마리를 통으로 들고 갈 거라며 헛소리했었으나, 지금은 춥고 긴장되는 수능날 먹을 도시락을 싸지 못하는 수험생이나 수능을 보지 않기로 택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주변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으며 수험장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가 수능이라는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모든 이가 잘 살 수 있기를.
열아홉 나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이 공감하지 않았던 사실을 지금의 나는 조금 받아들인 것 같다. 수능도 인생의 수많은 시험 중 고작 하나라고. 어쩌면 이 시험이 제일 쉬운 시험일 수도 있다고. 평생 이렇게 많은 시험을 치르며 살아야 한다고? 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번 시험을 못 보더라도 다음 시험에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오늘 점심 메뉴 선택이 실패여도 이따 먹을 저녁 메뉴를 상상하며 살 수 있고, 힘든 시험 와중에서도 도시락 까먹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오늘의 도시락 메뉴는 며칠 전의 기뻤던 일. 내일의 도시락 메뉴는 가장 좋아하는 음악 한 곡. 소소한 기억들과 취향들로 이루어진 밑반찬이 그득한 도시락 메뉴를 까먹으며 오늘도 힘차게 인생의 시험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