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의 나와 너
(3)
아무렇지 않은 척 열 세살이 되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아무 일을 겪지 않고, 그저 의젓한 사춘기 소녀가 된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6학년 생활은 소소했다. 맨 손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담임 설까치는 커터칼로 연필깎이 대회를 한 달에 한 번씩 열었고, 상품을 주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공부를 더 열심히 시켰다. 물론 풍물패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는 N시가 주최하는 대회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탔다. 학교로는 영광이었다. 그저 취미로 하던 게 다였던 교사가 상까지 받아냈다는 것을 교장은 기뻐했다. 설까치는 위풍당당해졌다. 싸우기보다 함께하는 게 더 좋다고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이야기하는 담임 안에서 교실은 그나마 평온했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행동하는 것을 점차 버렸다. 그룹 안에서의 다툼이 있었고, 패가 나뉘었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지막엔 주남이 혼자 남았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우리 반 줄곧 일등인 주형이와 앞뒤를 다퉜다. 우리 둘 다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달랐던 점은 엄마가 학교에 오시느냐 마느냐였다. 차가 없는 우리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에 자주 올 수 없었다. 그저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나더러 대신 전해달라고 할 뿐, 직접 학교로 오는 일은 없었다. 반면에 주형이 엄마는 뻔질나게 학교를 드나들었다. 어느 날에는 봉투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그것이 편지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풍물패에 간식을 사다 주고,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화통했기에 그 아줌마가 교실에 자주 와도 아이들은 주형이를 '마마보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주남이가 힘을 잃은 것은 주형이와 헤어진 후였다. 어린애들의 연애는 놀랍게도 어른과 비슷해서 각자의 친구들은 상대방에게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웃긴 건, 그 찰나를 뚫고 다시 주형이와 연애를 시작한 다정이가 있었다는 것.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학생에게 버려진 주남은 이제 설 자리가 없었다. 다정이는 집에서 둘째로, 눈치도 빠르고 유머스럽게 아이들 사이에서 농담을 던지며 힘을 길러온 알짜배기였다. 나도 다정이가 밉진 않았다. 그 시절 모두 등 돌릴 때 유일하게 나를 사람답게 대해준 아이라서, 적어도 내게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시킨 아이는 아니라서...
모두가 주남이를 외면할 때, 손을 내민 건 의외로 내 단짝 유리였다. 유리는 늘 이모에게 '매너'라는 것을 배워왔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순서라던가, 사람 사이에서 조심해야 할 질문이라던가, 아직 13살이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그 매너를 보여줬다. 그래서 나는 유리가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모두가 다 나쁘다고 해서 나까지 돌을 던지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 내 수준에서는 낼 수도 없는 그 용기를 유리가 가르쳐줬다.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처럼 나와 유리 그리고 주남이는 열 세살 겨울, 서로를 어정쩡하게 받아들였다. 어렵고도 쉬운 일이었다. 그 마음은 오래가야 했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다른 중학교로 배정을 받고, 우리 셋만 같은 중학교, 그것도 같은 반으로 배정을 받았기 때문에.
상황이 이쯤 되면, 내가 뾰족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남이를 궁지에 몰아넣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수많은 밤을 뿌리치고, 굳이 굳이 미워하는 마음을 거둬야 했다. 그렇게 입학을 앞두고 겨울 방학 내내 나는 나와의 싸움을 했다. 미친 척 기억을 잃은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당한 만큼 갚아줄 사람이 될 것인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3월이 되기 며칠 전, 유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같이 영화 보러 가자. 주남이도 같이."
"나는 그 영화 별론데, 둘이 가서 보고 올래?"
"왜 그래~같이 가자."
"생각해 볼게."
수화기의 뚜뚜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진동을 느꼈다. 나는 친구를 잃을 수도 있겠구나. 유일한 친구를. 내가 애써 꾸려온 세상과 같던 그 친구를. 그런 예감은 왜 그렇게 정확한지 어른보다도 애들의 촉이 더 정교했다. 엄마가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차려준 저녁 밥상이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고민을 했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그 해 겨울의 고민은 깊고도 어두웠다. 고작 열네 살이 겪어내기엔 인생 전체를 흔드는 마음 한 순간을 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다. 주남이와 유리는 영화관을 다녀온 이후로 둘이 단짝이 되었다. 어린 나도 어렴풋이 알았다. 애써 붙잡아도 놓칠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많이 애쓴다고 달라지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을. 열한 살부터 열세 살까지, 그렇게 3년 동안 배우고 또 배웠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놓아줬다. 유리와 쓰던 교환 일기장을 버렸다. 그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따가웠다. 그냥 용서할걸... 그냥 영화관에 가 볼걸... 처음부터 내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었는데, 마치 내가 제일 잘못한 사람이 되어 남겨진 기분이었다. 중학교의 새 학기가 되었고, 나는 둘을 모른 척하며 지냈다. 그 둘도 나를 새로 온 전학생인 양 대했다. 중학교라는 곳은 모든 초등학교의 아이들이 다시 한번 모이는 장소였다. 조용하고 기죽은 나로 똑같이 드러내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변했다. 손을 들어 질문을 했고, 담임이 시키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도왔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전 과목을 관리해 주는 학원에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친구는 저절로 생겼다. 담임이 예뻐하고 아이들은 나를 어려워하면서도 따랐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사람 곁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게다가 호감까지 가지고 있다는 게 구름을 타는 것 같이 몽글몽글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새로운 나를 덮어쓰고 학교에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즐거웠고 그 두 사람은 나에게 잊혔다.
별 탈 없이 3년이 지나고 학군지로 이사를 갔다. 엄마의 욕심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학교에는 나만 다녔다. 아이들은 모두 동네에 남아 농어촌 점수를 받는 사립에 갔다. 주남이도 유리도 그런 선택을 했다. 멀리 학교를 다니고, 정신없는 입시 속에서 나는 따끔한 시간을 모두 잊었다. 스무 살은 불현듯 찾아왔다. 대학의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 후, 청량리에서 다시 주남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럭저럭 살았다. 괜찮다고 생각해 왔는데, 아니었다. 까만 눈망울에 까만 머리를 하고 새침하게 서 있는 주남이를 보니 속이 뒤집어졌다.
11살의 내가 튀어나와서 그 애의 뼈 마른 발을 밟고 싶었으니까. 나는 괜찮지 않은 게 맞았다. 시선을 돌려서 정거장 표지판에 떨어져 버스를 기다렸다. 주남이는 나를 보며 움찔하더니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이었다. 준이로부터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시 그 애를 잊고 살았다.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잡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나는 늦된 사람이었다. 성실했지만 운은 없는 사람. 세상은 성실한 사람을 이제 높이 쳐 주지 않았다. 실력이 있거나 재능이 있거나 기발한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어느 곳에도 낄 수 없는 사람이라, 잠자코 조용히 직장을 다녔다. 이제 좀 살만한 가 싶을 때, 연락이 뜸하던 준이에게 연락이 왔다.
나와 같이 선교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나의 유일한 친구. 남자인 친구 준이. 어쩐지 그는 늘 한량 같았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술도 좋아해서 술이 취하면 언제나 전화를 하곤 했다. 별 내용이 없는 통화였다. 안부를 묻고, 자신을 탓하고, 세상을 욕하다가 끊었다. 취중진담이라기보다는 취중넋두리여서 나는 한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전화를 받지 않고 지내던 몇 달이 지나고, 준이가 전화할 시간이 아닌데... 싶은 점심쯤 전화가 왔다.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정신일 테니까.
"야, 뭐 하냐?"
"뭐 하긴.. 점심시간이지."
"나 차였는데, 술이나 사라."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사줄게. 이따 우리 고모집 뒤에 공원에서 만나자."
"알겠어."
"그래 이따가 퇴근하고 연락할게."
오늘따라 사람이 많은 날이었다. 돈을 바꾸는 손님부터, 마트가 끝난 정산을 가져온 손님, 거액의 수표를 찍어서 가져가는 손님... 모두가 바빠서 실수를 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며칠 전에 서류 금고에 들어가서 손님에게 맞는 말 한마디 했다가 머리를 맞았던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조심해서 일했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온 손님에게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말했을 뿐인데 cs에 점수 니가 다 까먹을 일 있냐면서 왕언니인 희재가 나를 조졌다. 머리를 툭툭 치며 네까짓 계약직이 점수를 다 까먹냐고, 이제 일 할 날이 얼마 안 남아서 대충 일하는 거냐고, 그동안 나에게 맺힌 모든 것을 폭포수처럼 풀었다. 앞에서 욕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 말했다.
'개년... 매일 카드발급 실적만 쌓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나이만 많아서 텃세 부리는 년.. 진짜 못났다.'
남은 며칠을 연가를 써서 엿먹이고 싶었지만, 나를 소개해 준 부지점장님 체면이 있어서 참았다. 마무리를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다물고 일했다. 다행히 실수가 없었다. 전표에서도 수표 발행에서도 하루에 꼭 한 두개쯤 있던 실수가 그날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준이를 만날 수 있었다. 걔 마음은 울적하겠지만 우선 내 기분이 우선이니까, 가뿐한 내가 울적한 그의 마음을 들으러 발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