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들(4)

11살 나와 너

by 여름

(4)

집에 들러 고모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카스를 살까 아사이 맥주를 살까 고민하다가 비싼 아사이를 택했다. 준이가 자주 마시지 않는 캔맥주였다. 그는 소주파였기 때문에 아주 가끔 내가 술을 살 때만 맥주를 마셨다. 적당히 진심을 고백할 만큼만 먹어야 우리의 대화도 빨리 끝날테니, 내가 소주를 굳이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편의점에서 차가운 맥주를 들고 나오니, 제일 끝 벤치에서 어깨가 축 처져서 누가 봐도 실연당한 남자의 등을 보여주는 준이가 앉아 있었다. 뒤로 몰래 가서 목덜미에 맥주를 갖다 댔다.


"어우씨."

"너는 그게 인사냐? 이 싹수없는 놈아."


"아 그러니까 왜 사람 놀라게 하냐고."

"사람이 좀 놀래야 힘든 마음도 잊고 그러는 거지. 매일 제정신이면 힘들어서 살겠냐. 뭔데 왜 그래?"


"나 헤어졌어. 차였어."

"너 새끼 차이는 게 하루이틀 일이냐? 별... 같잖은 일로 직장인을 오라 가라 하냐."


"이번엔 진짜야. 진짜로 슬퍼서 부른 거야."

"네가 언제는 안 슬펐냐고 병신아. 이럴 때마다 내 개미오줌 같은 월급을 술값으로 날리는데, 나한테나 좀 미안해해라. 제발."


"주남이야. 주님이랑 헤어졌다고."

"이게 뚫린 입이라고 막 뱉네. 너 그동안 그래서 나한테 말 안 한거야? 진짜야?"


준이도 알고 있었다. 내가 주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세세히 가슴 아프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남이와 준이가 만나는지도 모르는게 당연한 듯 싶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누구를 만나도 만난다. 헤어졌다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게 누구인지 내가 그 여자를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설명할 수 있을만큼 말하던 놈이었으니까. 건네주려던 캔맥주를 바닥에 던지려다가 비싸서 참았다. 오늘은 열받아도 하루 참아줄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꿀꺽하며 마시는 얄미운 목구멍을 한 대 치지 않고 놔뒀다.

내가 대체로 여태까지 들어왔던 준이의 연애보다 깊은 감정이었다. 그저 외로워서 사람을 자주 만나는 애라, 이번에 또 누구랑 헤어졌나보네, 가서 속앓이나 들어줘야지 했는데, 이 한량 같은 놈이 누군가를 책임지려고 했다니... 내가 살면서 봐 온 준이의 모습이 다가 아닐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누구를 책임지기엔 짐 같아서 싫고, 부모님 늙어가시는 것만 봐도 숨이 막힌다는 놈이 '책임'을 들먹거리니 우스웠지만 그만큼 진심이었나 하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아니 그러니까, 지 몸뚱이 하나도 버거워하는 놈이 뭔 누굴 책임지냐고."

"주남이가 애가 있어. 그래서 그랬어."


내가 막연히 생각해 왔던 현재가 아니었다. 주남이는 악착같이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애였고 자기 이익이 제일 중요한 애였으니까 혼자 애를 키운다는 건 아주 뜻밖이었다. 자기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니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애를 버리고 지 몸만 쏙 나오거나 아니면 자기 애를 너무도 끔찍하게 여겨서 혼자서는 키운다는 선택을 할 리가 없거나. 준이에게 들은 이야기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주남이는 집에서 맺어준 결혼을 했다.

집이 순식간에 망했고, 주남이는 대학을 간신히 다녔다고 했다. 장학금을 타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주 어렵게 말이다. 빚덩이는 점점 불어나서 주남이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계속 공부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유학을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오빠 때문에 돈을 벌어와도 빚은 줄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 묶인 큰 빚을 모두 갚아주고, 오빠의 유학비용까지 대준다는 집에 주남이는 시집을 갔다. 옛날에나 들어보던 그런 이야기였다.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고 다른 가족들은 편하게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말이다.


4학년 봄, 주남이네 집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내가 주남이의 생일잔치에 가서 본 주남이네 집은 그 여느 집과 달랐다. 할아버지가 도포를 입고 계셨고 집에는 한문으로 쓴 여러 가지 글들이 액자로 걸려있었다. 주남이 오빠는 집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었고, 주남이는 마지막 차레였다. 주남이 생일잔치에서 시끄러웠던 시간은 우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무거움에 어린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고, 나가라고 재촉하며 내쫓은 사람도 없었는데 밖으로 나와서 놀았다. 그것이 내가 주남이와 친했던 시절, 아니 주남이의 무리 안에서 지냈던 시절 마지막 기억이었다. 주남이네 집은 방이 네 개에 4층짜리 건물이었다. 맨 꼭대기층을 주남이네가 쓰고 아래는 세를 줘서 돈이 많다고 소문난 집이었다. 일층에는 두일 자동차 학원이 있었고 매일 문전성시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곳은 망하기가 어려운 건물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는 말이다. 내가 멍하게 생각에 빠진 것을 눈치챈 준이가 말을 이어갔다.


"걔 아들이 이제 겨우 돌쟁이야. 그래서 같이 살고 싶었어."

"너 혼자 생각 아니고?"


"글쎄다. 주남이 속을 알 수가 없어서..."

"잘 헤어졌다. 자기 새끼도 매일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데, 너 같은 놈이 무슨 수로 애아빠가 되냐.

너네 엄마아빠 기절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걔는 옛날부터 속을 알 수가 없고 자기 자신만 중요한 애야. 아마 다른 남자 생겼을 거다. "


"너 어떻게 알았어?" 준이가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긴, 인성이 글러먹었는데, 널 찬 이유가 별 게 있겠냐. 더 조건 좋은 사람 나타난 거지."


입이 움직이는 대로 내뱉었지만 준이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아는 주남이는 그런 이유에서만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살아온 와중에 가장 나쁜 사람으로 기억된 최초이자 마지막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얼른 마시고 일어나자. 춥다." 준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혹여나 전화하지 마라. 걔는 꼬마일 때부터 그런 애야. 자기가 제일 유리한 선택을 하는 애."


"알았어. 알았어. 안 해."

"두 달만 참아라. 두 달 지나면 너 또 연애한다고 나한테 자랑하면서 전화할 걸?"


준이의 눈은 울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준이가 울지 않길 바랐다. 고작 저런 애 때문에...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드라마를 자주 봐서 그런지 준이는 주인공병에 자주 빠져있는 어른이었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많고 자기가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른. 아쉽게도 준이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오늘 이후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세계는 작고 빈약하다는 것을, 자기가 제일 우선인 여자가 함께 둥지를 틀기에는 복도식 아파트만큼 구질하고 좁다는 것을.


준이가 새로운 여자를 사귀고 다시 그 연애가 마지막인 것처럼 기뻐할 때,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시댁에서 그렇게 반기던 눈치는 아니었지만, 나는 좋았다. 나와 남편을 닮은 아이가 어느 날엔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가도 깊게 잠이 들어 감은 눈 아래로 펼쳐진 긴 속눈썹이 너무 귀여워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계약직으로 일하던 은행에서는 출산 휴가를 받고 잘렸다. 예상한 수순이었다. 은행 공채시기에 맞물려서 나는 갈아 끼워졌다. 어차피 아이를 맡기고 출근할 여건은 되지 않았다. 생활이야 쪼들리기 시작했지만, 어디에 아이를 보내기는 너무 어렸다. 다만 그 간의 의리로 실업 급여는 받게 해 줬다. 당분간은 그렇게 구직을 하는 원서를 내고 실업 급여를 받으며 사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무심하게도 시간이 흘렀다.

나는 등하원 시간에 되도록 엄마들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원치 않게 누구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입에 대는 것도 싫었다. 하루하루는 별일 없었고 아이도 잘 커갔다.

다행히 나를 닮지 않고 제 아빠를 닮아서 무던한 아이였다. 작은 아파트에 살던 우리는 계약이 끝나가던 마지막 달에 청약에 당첨되었다. 원하던 집은 다 떨어지고 추첨으로 간신히 들어가게 된 집이었지만 그동안 이사 다니며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그 집은 너무 소중했다. 아이의 방 하나, 우리 방 하나, 작은 거실이 다인 집이었지만 이제야 새로이 우리의 색깔로 채울 공간을 생각하면 벅찼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이사를 가게 될 테니 그것 또한 우리에게 딱 맞는 시간표같이 느껴졌다.


이사를 간 곳은 대단지였다. 초등학교를 품은 대단지, 길을 건너지 않고 초등학교를 품에 안아서 초품아라고 부르는 아파트였다. 길 건너 아파트는 시세가 더욱 비쌌다. 방이 기본 4개인 긴 건너 아파트는 밤엔 아파트 벽으로 브랜드 네임에 불이 들어왔다. 깜깜해진 밤에 창밖에 멀리 그 비싼 광경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가 없는 집에서 남의 집 크리스마스트리를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아파트 로고를 보면 어쩐지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자라났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부탁한 것은 한 가지였다.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누군가를 속이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다. 내가 유리하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서 일수도 있고. 내가 11살 때 엄마에게 내 슬픔을 감춘 것처럼 아이도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는 아이답게 있는 게 속 편했다.

딸에게 늘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엄마 아빠한테 말해줘. 우리는 네 편이야."


딸아이가 입학을 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첫 한 해를 잘 보내고 나서, 나도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아파트 상가에 생긴 프랜차이즈 영어학원이었다. 아이를 보내고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짧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원장은 입담이 좋아서 공부방이었던 것을 몸집을 불려 이 신도시까지 옮겨왔다고 들었다. 내가 옆에서 본 그녀는 실력이 뛰어나지도 학벌이 좋지도 않았다. 그저 강사를 잘 뽑았고, 학부모들에게 가서 착 감기게 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만 해도 굴러가는구나. 사람의 감과 처세는 그저 무식하게 성실하게 사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구나 그녀와 일할수록 생각이 굳어졌다. 아이를 내가 일하는 학원에 등록시키지 않았다. 길 건너 단지에 수업료가 좀 더 비싼 학원에 보냈다. 내가 아이들의 잔시중을 들어주고 받은 돈으로 다시 아이를 학원에 보냈다.

아이는 학원을 좋아했다. 원어민 강사도 있었고, 사람들이 대부분 젊고 쾌활했다. 원장은 차분하고 지적인 스타일이었다. 홍보나 강요는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더 많은 클래스를 듣도록 유도하는 재주가 좋았다.

남편과 내가 일을 하고 하나뿐인 아이는 학교와 학원에 무사히 잘 다니고 우리 가족에게도 평안한 시절이 오고 있구나 내심 만족했다. 그 마음에 균열이 살짝 간 것은 아이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엄마 있잖아. 학원에서 애들이 지담이 괴롭힌다? 매일매일 괴롭혀. 돈도 뺏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너도 지담이 괴롭혔어?"

"아니.. 나는 아니야."

"그래, 친구 괴롭히면 안 되지. 엄마가 말했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알았어. 거짓말 안 해."

"지담이 괴롭히는 거 학원 선생님도 알아?"


"아니, 아무도 몰라. 나만 학원 뒤에서 봤어."

"그럼 네가 도와주지 그랬어. 친구들한테 가서 그만하라고 말리지 그랬어."


"걔네는 3반이야. 나는 잘 모르는 애들이야."

"다음에 다시 보면 학원 선생님한테 도와달라고 해."


"알겠어."

딸은 어쩐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담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딸의 친구들 중에 지담이는 없었다. 그저 학원에서 알게 된 아이였지만, 그 후로도 딸은 종종 지담이 이야기를 했다. 지담이는 12살이라고, 말도 행동도 좀 느리다고 했다. 그래서 딸아이의 반인 11살 반에 들어와서 같이 공부를 한다고.

나는 집중해서 듣는 시늉만 할 뿐, 아이의 이야기는 금세 내게 잊혔다. 한 달이 지나고 학원비를 결제하러 아이 학원에 들렀다. 한 여자가 원장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일하는 엄마였다. 오후가 되어도 무너지지 않은 화장에 흰 셔츠와 검은 정장을 위아래로 입은 여자는 아파트 안에 흔하지 않았으니까.

결제 순서를 기다리는데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의 엄마는 이내 흐느꼈다. 원장은 애엄마에게 티슈를 건넸다. 그렇게 다섯 장의 티슈가 오갈 때쯤에야 그 여자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주남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주름이 지고 화장기가 짙은 얼굴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까만 눈과 오만한 코, 길게 기른 새카만 머리는 여전했다. 주남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안경을 벗었고 작은 눈이 늘 싫었던 터라 성형을 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지담이 어머님, 너무 걱정 마시고요. 제가 잘 알아보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원장님만 믿을게요."


아이가 한동안 지담이 얘기를 해도 나는 대충 흘려들었다. 나 사는 게 바빴고, 딸아이의 친구도 아니었고, 어차피 나는 과거의 11살이 아니었으니까. 그 애는 나에게 모르는 애였다. 차라리 내가 11살이었다면 달려들어서 그 아이를 구해줬겠지. 그 나이에는 어른의 중재보다 친구의 입김이 더 센 시절이니까.

주남이의 아들이었다. 말과 행동이 느리고 학교를 한 해 늦게 들어와서 12살인데도 11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아이가, 바로 지담이었다. 안타깝진 않았다. 내가 그 애 엄마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지담이는 그저 돈만 좀 뺏겼을 뿐이니까, 내가 굳이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사건을 중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름캠프에서 그 일이 있은 후로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금요일 연재
이전 03화그녀의 아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