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들(5)

11살의 나와 너

by 여름

(5)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딸의 학원에서 '섬머캠프' 신청서가 도착했다. 4박 5일 일정으로 지방의 한 폐교를 빌려 말 그대로 놀러 가는 것이었다. 내 두 달 치 아르바이트 비용이었다. 아이는 친한 친구들이 다 신청했다며 나를 졸랐다. 겨울에 가족 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적금을 깼다. 신청서에 아이의 이름을 적고 안내 받은 계좌로 돈을 송금했다. 아이는 여름 방학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기뻐했다. 평소에 감정 표현이 두드러지는 아이는 아니라 그 캠프를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느껴져서 잠시 망설이며 고민한 내가 미안해졌다.

출발은 일주일 후였다. 여름 캠프에 가서 예쁘게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내내 기분이 좋겠지 싶어서 아이와 오랜만에 옷을 사러 갔다. 아이는 언제부터인지 나와 옷을 고르는 데에 차이가 극명해졌다. 좀 더 밝고 화사한 옷들을 고르는 나와 달리, 아이는 검정이나 회색 같은 무거운 무채색 계열의 옷을 선택했다. 그저 '아이'인 시절이 지나가는구나 마음으로 아이의 변해가는 모습을 인정하는 시간이 늘어가는 중이었다.


드디어 아이가 기대하던 여름 캠프를 떠나던 날, 매일 학교에 갈 때 그랬던 것처럼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할 수 있어. 파이팅!" 외쳐주며 아이를 학원 차에 태웠다. 긴 거리를 이동할 아이를 위해 간단한 간식을 싼 주머니와 옷가지들을 챙긴 배낭을 메고 아이는 떠났다. 처음이었다. 아이를 낳고 이렇게 길게 떨어져 있어 본 적은. 작은 해방감과 동시에 불안함이 스쳤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비상 연락처를 받아놓고 태그를 걸어 저장해 두었다. 남편과 나는 둘 만의 방학을 맞이했다. 심야 영화를 보기도 하고 아이는 아직 좋아하지 않는 우리 둘만의 취향이 담긴 음식을 먹으러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원장의 번호로 문자가 왔다.

{현장 사정으로 인해서 아동들을 각 가정에 귀가시킬 예정이니, 오후 4시까지 학원 앞에서 보호자에게 인솔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예정된 캠프와 달라진 일정 부분은 추후 비용 정산을 통해서 환불 안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남편이 일하지 않는 날이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가고 나는 집에서 아이를 맞이하기로 했다. 문자를 받은 나는 무슨 사정일지 조금 궁금했지만, 장소에 문제가 있었겠거니 하며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3일 만에 본 아이의 얼굴을 어딘에 모르게 그늘져 있었다. 잘 먹지 못했거나 잠을 설친 얼굴은 아니었지만, 회색빛 붓으로 한 번 그어놓은 것 같은 그늘진 얼굴이었다. 당장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는 아이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잘 다녀왔어? 고생했어. 우선 씻을까?"

아이는 말없이 나와 남편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길어야 20분이었을 아이의 샤워 시간이 길어졌다. 남편과 나는 둘이 모르겠다는 눈빛만 주고받을 뿐, 어떤 말도 나눌 수 없었다.


욕실에서 나온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며 남편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까 내내 망설였다. 우리가 그동안 아이에게 쏟은 시간이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기 위한 마중물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좀 자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가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남편은 아이가 편히 쉬도록 작은 방 에어컨을 켜고 잠자리를 봐주었다. 그렇게 아이는 까만 밤이 되도록 깨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인데도,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깨워서 번거롭게 하기보다는 그냥 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 방문에 노크를 하지 않고 기다렸다.

새벽이었다.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아이가 서 있는 안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왜? 잠 깼어? 배고파서?"

아이에게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뚝뚝 한 두 방울 흘리던 눈물이 이내 많아졌다. 아이는 울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 울음소리에 놀라서 깨어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몸을 떨며 길게 울었다. 달이 차서 기운 탓인지 그 밤은 더욱 깊게 느껴졌다. 우리는 아이를 같이 안고 서 있었다. 격하게 울던 아이의 몸이 점차 진정되고, 거실에 작은 등을 켜서 아이와 소파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남편이 입을 뗐다. 아이는 30분이 넘게 긴 상황을 설명했다. 캠프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처음 10분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들었는데 그다음 5분은 상상이 되어 소름이 끼쳤고 나머지 이야기는 우리 부부가 태어나서 들어본 아이들 이야기 중에 가장 슬프고도 잔혹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면 너무도 나쁜 마음이었을까?


아이는 성당의 고해성사 차례를 기다려 온 사람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고는 한참을 더 울었다. 아이에게 괜찮다고 엄마 아빠가 알고 있으니 이제 아무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서 진이 빠진 아이를 달래다 보니 날이 밝았다. 나는 아침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상가 학원에는 사정이 있어서 일을 나가지 못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학원 오픈 시간은 11시였다. 학원 앞에는 캠프가 일찍 끝나서 화가 난 학부모들이 몰려와 있었다. 나는 그 부모들과 달리 두려웠다. 아이가 목격한 일을 아이에게 캐내어 갈까 봐 무서웠다. 원장실에는 사람들이 몰려와 항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아이의 영어학원 담임에게 아이 짐을 꺼내어달라고 했다. 그동안 활동한 학습지, 아이의 학용품, 학원 책가지들을 챙겨 오늘로 아이가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을 전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그 소리보가 쫓아오는 속도보다 내 걸음이 더 빨랐다.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니 가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학원 원장과 학원 담임의 연락처부터 차단했다. 그 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방법은 그게 가장 빨랐다. 상가에 있는 빵집에 들러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소금빵과 에그타르트를 사고 집 현관 비밀 번호를 눌렀다. 남편이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현관에는 모르는 여자의 구두와 남자아이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지담이와 주남이었다. 우리 집 흰 소파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을 방 안으로 불러서 무슨 일인지 이유를 물었다. 아이는 지담이가 친구라고 말했고, 아이 엄마가 너무 울어서 매몰차게 문을 닫고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고. 매사 무른 남편이 말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남편은 왜 아이가 먼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남편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거실로 나갔다. 주남이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눈알이 밖으로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자식을 앞세우고 가서 무릎을 꿇고서라도 아이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말이 느리고 망가진 사운드 북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자식을 가진 엄마라면 더더욱.

속이 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찬물을 내어서 모자에게 건넸다. 지담이는 조용히 앉아서 발끝만 바라보고 주남이는 물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도와주세요."

물을 마시고 한 첫마디는 그거였다. 도와 달라는 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도와달라는 말에 인색하기가 어려워졌다. 아이를 낳기 전에 뭘 모르던 내가 내키지 않으면 그냥 무시하거나 돌아서기도 했던 날들을 반성케라도 하듯이,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매번 도와주었다. 먼저 나서서 요청하지 않아도 우리를 도와주었다. 싹수없던 시절의 못남을 감춰보고자 나도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담이보다는 내 딸이 먼저였으니까. 그 누구도 내 딸보다 먼저일 수는 없으니까.


"무슨 일을 도와 달라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진정하시고 아이와 돌아가시면 좋겠어요."

"제발...제발....이음이가 본 것만 말해달라고 부탁드릴게요."


마음 같아서는 지담이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뻔뻔한 년,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도움을 청하냐고, 너는 그럴 자격도 없는 년이야. 당장 꺼지라고. 너 내가 누군지는 아냐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아이가 있기에 지담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나의 체면 때문이 아니라 내 아이의 영혼이 더 다칠까 봐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돌아가세요. 일은 학원에 가서 해결하시면 좋겠네요."

"한 번만 좀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주남이의 애원하는 얼굴은 11살의 나를 닮아 있었다. 내가 일기를 쓰지 않을 테니, 그만 괴롭히라고. 담임 선생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그냥 모르는 척해달라고. 쓰레기를 버리는 바깥 운동장 뒤 편에서 울면서 무릎 꿇었던 나의 얼굴. 그 얼굴이 스쳤다. 주남이는 기억할까? 나의 눈물 가득했던 얼굴을, 사정했던 내 작은 두 손을...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런 일로 우리가 30여 년이 넘어서 다시 만날 줄을 알지 못했겠지. 서로의 입장이 바뀐 채로 만날 줄은 더더욱이나. 애를 혼자 기른 사람의 끈기는 이럴 때 나오나 보다.

연신 거절하는 내 앞에서 명함을 꺼내어 탁자에 두고 간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탁자에 두고 간 명함을 찢었다. 같은 애 엄마라는 이유로도 고민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신의학과 상담을 물어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놀라는 동생에게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둘러대고 A교수를 추천받았다. 가장 빠른 날짜는 다다음주 수요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아이가 그때까지 마음에 그런 일들을 담아두고 있어도 될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동네 아무 곳에나 가서 아이의 마음을 털어놓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다음주쯤이면 혹시라도 조금 잊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하면서 아이에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대했다.


아이는 잠에서 자주 깼다. 분리 수면을 일찍 시작한 아이였고, 제 아빠를 닮아서 잠자는 게 행복하다고 할 정도로 깊은 잠을 잤기에 나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눈덩이가 불어나는 수준은 우스울 정도로 불안이 나를 옭아맸다. 나가던 학원에 아이가 아파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일을 그만두었다. 치사하고 더러운 일이 가끔 있었어도 아파트 대출금 정도를 커버하거나, 아이의 학원비를 충당하는 작지만 또 그렇게 작지만은 않은 돈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낳고 쭉 집에만 있던 내게 그 작은 학원은 구원이었다. 살면서 누구 엄마나 누구 와이프로 불리지 않고 거기에 돈까지 줬으니 나에게는 새로운 명함을 하나 파 준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숨통을 트이는 일도 나에게는 지금 사치였다.

아이와 병원 흰 복도에 앉아서 무표정하고 무력하게 대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이 막혔다. 내 아이는 내가 늘 불안해하고 힘들어해서 꺼내기조차 어려웠던 모든 것들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심하고 낳았는데, 그 결심은 다른 일에 의해서 아주 쉽게 무너졌다. 사람의 유약함이란 이런 거구나. 제 새끼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도 또 지키려고 노력하는 유난스러움이구나. 나는 병원 복도에서 이음이와 한참을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의사를 만나러 들어갔다. 의사는 마스크를 썼고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을 가진 백발의 50대 여자였다. 그녀는 딱히 캐묻지 않고서도 아이의 마음을 다 읽어냈다. 말하기 싫으면 다음에 와서 해도 된다며 아이를 구슬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가 나가 있어도 되냐고 물어보곤, 나에게 나가 있기를 권했다. 아이가 얼마나 상세하게 그날의 일들을 의사에게 말했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저, 아이가 모든 걸 토해내고 다시 내가 키우던 마음 한편에 티끌하나 없는 사람으로 되돌아와 주기를 바랄 뿐이었으니까. 얼마만큼의 진실과 두려움이 아이를 통과해서 의사에게 닿았을지는 나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냥 그냥 내 아이로 돌아와 줬으면 그뿐이었다.


경찰이 찾아왔다. 아이에게 간단한 것들을 좀 물을 수 있냐고 요청했다. 나는 거절했다. 아이는 지금 심리치료를 받고 있고 그 어떤 것으로부터 더 이상 충격을 받으면 안 된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내밀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단서를 놓친 사람들처럼 안타까움에 혀를 찼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이를 누군가에게 노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날카로운 매의 부리에 겁이 났지만 새끼를 지켜야만 하는 작은 참새가 된 기분으로 나는 아이를 보호했다. 매일 밤마다 고민했다. 아이에게 솔직하라고 늘 말해왔으면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저렇게까지 더럽고 추한 일을 겪었는데 함구해도 되는 걸까? 내 아이에게도 어느 날 불행처럼 닥친 일에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때 나는 지금의 선택을 감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는 머릿속의 상상은 끊이질 않았다. 끊었던 수면제를 다시 먹어야 했다. 우습게도, 수면제를 먹으니 머리가 아침마다 멍해서 밤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는 날이 갈수록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거면 되었다. 내가 수면제를 먹는 밤이 늘어날수록, 아이는 괜찮아졌다. 내가 살 날보다 아이가 살 날이 훨씬 길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좋은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 믿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달라며 주남이가 찾아왔다. 아들이 너무 괴로워하고 있으니, 제발 한 번만 도와 달라고 내 손이 으스러지도록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매정한 손끝으로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다시 찾아온다면 스토킹으로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내 아이를 니 아들과 함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소리 질렀다. 큰소리가 되도록 나지 않는 곳의 주민들은 예민했다.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경비실로 연락을 했고 주남이는 끌려내려 갔다.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저 좋게 좋게 나도 자식 기르는 사람이니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고 곱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은 악역으로 등장해야 끝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그 날 명확히 알게 되었다. 발끝이 질질 끌린 채로 내려가던 주남이를 보고 난 후에 나는 그날부터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열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주남이와 지담이가 직접 쓴 편지였다. 마치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이 마지막이라도 마음을 바꿔달라고 보내는 애절한 편지와 다름없었다. 그렇게 열 통의 편지가 일방적으로 도착하기까지 두 계절이 지났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첫눈이 오고 도로는 마비되었으며, 이번에 서울 제설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7시간 갇혀 있었다고 사람들이 원성을 토했다. 퇴근길에 갇힌 남편도 들어오자마자 욕을 했으니, 첫눈의 감성은 집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자 나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제는 그들에게 답장을 보낼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백이 없고 눈에 띄게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골랐다.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나의 11살 일기장을 찾아왔다.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서 엄마도 아빠도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무지개색 일기장이었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내 일기장은 지담이와 주남이에게는 축복과 저주를 함께 담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카드에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적었다.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덧붙였다. 내가 누구인지, 너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다른 종이에 상세히 적었다. 차마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복수를 함께 담을 수 없었으니까. 일기에는 11살의 내가 눈물로 적은 수많은 일들이 남아있었다. 이제 글을 읽는 나이가 충분히 되는 지담이와 30여 년이 흘러 기억하지 못할 주남이에게 주는 나의 우아한 거절이었다. 누구에게도 선물과 카드를 보내지 않은지 족히 15년은 된 것 같다. 오랜만에 선물을 곱게 포장하고 카드를 쓰니 한껏 들뜬 기분이 났다.

두 모자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특별하고도 충격적이어서 잊지 못하겠지, 생각하니 속으로 위안이 되었다.

11살의 내가 11살의 너를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니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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