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게 받아 적어야 하는 사랑
(1)
엄마는 손맛이 좋았다. 그리고 인상이 깔끔했다. 장사는 우선 그 두 가지가 중요하다. 나머지는 차후 문제였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곤 했다. 에이 회사 다니기 힘들어. 드러워 죽겠는데 장사나 할까? 그건 윗대가리들이 많이 받아가는 만큼 골이 깨지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거다. 그 골 깨지는 가운데로 흘러나온 생명수 월급을 매달 꼬박꼬박 받아가는 팔자이기에 가능한 말일뿐이다. 다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장사가 싫었다. 아니, 장사하는 엄마가 싫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쉬는 날도 거의 없이 힘든 내색도 거의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거기다가 자식이 셋이나 딸린 인생이라는 것은 버겁고도 버거운 일이었다. 당사자만 아침 일찍 나가서 자신의 괜찮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묵묵히 좁은 헬스장의 트레이드밀을 타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엄마를 너무나 존경했고 또 지겨워했다. 살면서 틈이라는 게 조금은 있어야 들어갈 구멍이 있는데, 엄마는 매끈한 얼굴의 모공만큼이나 흠이 없었다. 그게 주변 사람을 지치게 했다. 묘한 재주였다. 모두가 엄마 덕에 먹고사는데, 그런 엄마를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엄마의 재주였으니까. 마음 한 구석이 시리도록 미안하면서도 애써 나는 저렇게는 살 수 없다면서 굳은 다짐을 하게 되는 건 아마도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제와 그렇게라도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나 스스로를 살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첫 식당은 분식집이었다. 이름은 '미래분식'이었다. 엄마의 자식 중에 미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없었다. 부르기도 좋고, 느낌도 좋은 이름을 며칠씩이나 골머리를 앓던 엄마는 미래분식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처음에 듣고는 엥? 하는 반응이었지만, 미래분식은 생각보다 자리를 잘 잡았다. 길 건너에는 중학교가 있었고 중학교 뒤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분식집은 마침 들어선 아파트 상가 1층에 있었다.
하교 후에 아이들이 길을 건너면 판떡볶이가 보글보글 끓고, 오징어튀김, 김말이, 야채튀김을 튀기는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옆 집인 빵집에 들른 손님들은 꼭 떡볶이를 사갔다. 느끼한 빵맛을 잡아줄 매콤한 것을 사서 돌아가는 것이 빵집 손님들의 루틴과 같았다.
시작할 때만 해도 큰 욕심 없이, 애들 학원비나 대야겠다고 결심했던 엄마였다. 하지만 생각 외로 분식집은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배달을 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점심 배달 좀 해달라고 성화를 하는 통에 배달도 시작했다. 그리고 김밥이 맛있다는 소문 덕에 운동회, 소풍이면 엄마는 새벽 4시에 나가서 김밥을 쌌다. 봄과 가을에 밀린 김밥 주문이 있던 새벽, 전 날 다 풀리지 않은 피로를 모르는 척하고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700줄의 김밥을 다 싸고 보내면 집으로 우선 돌아왔다. 집에는 학교를 보내야 할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다. 고1, 중1, 초1.... 나란히 1자리를 새겨들고 엄마를 기다리는 우리가 있었다. 그렇게 자식들이 제 나름의 긴장감을 가지고 새로운 곳에서 시작을 할 때, 엄마도 의지를 다졌다. 엄마 손끝이 야무진 것은 태생이었다.
동생이 그 감각과 손재주를 닮았고 깊은 속을 닮았다. 나는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고 손님 상을 치울 때마다 화가 났다. 깨끗이 먹지 않는 손님이, 남겨져 행주로 쓸어 담아야 하는 음식이, 분식 하나 먹고 가는 주제에 이거 저거 바라는 것도 많은 요구가 자주 나를 화 앞에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