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잔의 여름

나의 여름 셋

by 여름

나는 위와 장이 약한 사람이다. 여름은 찬 것이 무척 당기는 계절임에도 안타깝게 그런 욕망을 조금은 누르고 지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심신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언어 치료를 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오늘의 글감을 받고서 나의 여름 음료에 대해 바로 떠올려 보았다. 돌아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내 사랑 맥도날드를 먹었다. 그리고, 혹여나 머릿 속에 엉긴 기억들이 사라질까봐 재빨리 컴퓨터에 앉았다.


가장 처음 여름의 맛을 이야기하자면, 거의 3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초등학생 무렵 기억하는 여름의 음료는 '미숫가루'이다. 크고 나서도 그 맛이 그리워 카페에 '미숫가루'라는 메뉴가 있으면 종종 시켜보고 했는데 거의 실패했다. 열정 많은 사장님이 자본주의의 맛을 때려부어서인지, 내게 남겨진 기억 속의 맛과 판이하게 달라 실망을 안겨주기 일쑤였다.

무더운 여름, 에어컨이라는 것도 없어서 마당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리고 선풍기를 돌리며 그 앞에서 수박화채를 먹던 여름.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여름이다. 그 기억의 하이라이트는 무엇이냐면, 바로 옥수수와 같이 먹는 미숫가루였다.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미숫가루는 먹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달라졌다. 우선 간식거리로 배가 고플 때 먹는 미숫가루다. 이 때는 미숫가루를 평소보다 더 많이 넣고 물은 적게 넣은 뒤에 적당한 설탕을 넣어 젓다가 얼음을 동동 띄운다.

그러면 미숫가루가 약간 죽처럼 끈적하게 떨어지는데 그걸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별미다. 기분 좋게 시원한 미숫가루가 들어가면 출출한 속이 달래지면서 그 달짝지근한 맛에 더워서 짜증났던 마음도 진정이 됐다.

그 다음 버전은 이것이다. 주로 엄마 아빠가 텃밭에서 일하실 때 나에게 부탁하셨던 레시피인데, 평소만큼 미숫가루를 넣고 설탕과 물을 각각 보통 때보다 한 배 반 정도 더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얼음을 넣는다. 이것의 묘미는 목넘김이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혀로 느끼며 꿀꺽 소리를 귀로 듣는 목넘김 말이다. 더운 여름에 텃밭에 심어놓은 옥수수, 오이, 토마토를 따느라 정신없는 부모님이 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키시면 마치 대단한 임무를 받은 사람처럼 미숫가루를 만들고 스덴 주전자에 찰랑 거리게 담아와 부모님께 따라드리곤 했다. 그러면 두 분 모두 '아주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나를 칭찬해주셨다. 그 순간이 나에게도 기쁜 여름의 맛이었다.

그 맛과 함께 다른 이야기를 조금 더 덧붙이고 싶다. '미숫가루' 하면 내 기억속에 정감가는 잔상은 엄마가 쓰시던 도구들이다. 엄마는 늘 미숫가루를 컵이 아닌 커다란 스덴 보울에 물과 많이 넣고, 계란을 풀 때 쓰는 도구로 휘휘 저으셨다. 설탕도 국자로 많이 퍼서 넣은 후에 냉동실에서 틀에 얼린 얼음을 두 판 꺼내어 좌라락 부었다. 마지막으로 스덴 국자로 크게 크게 저으면 대용량 미숫가루가 만들어지는데, 그걸 꼭 국자로 먹을만큼 컵에 덜어주셨다.

음식은 뭐든 많이 해서 같이 나누어 먹어야 맛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에 처음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한 잔의 달큰하고 묵직하면서 부드럽고 고소한 맛. 지금도 그립지만, 그 맛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엄마의 맛에는 자본주의가 들어있지 않아서였을까. 여름이 지나고 우리집에 오신다는 엄마에게 다시 한 번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려 봐야겠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면, 나의 임신 초기를 견디게 해 준 음료다. 나는 원체 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 방광이 약해서 소변이 자주 마렵고 물을 마시면 배가 금방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덥던 여름의 시작, 임신인 것을 알고 난 후 이야기가 달라졌다. 억지로라도 물을 잘 마셔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천이 어려웠다.

안타깝게도 정수기물, 삼다수, 보리차 등등 모든 물이 비릿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입 안에서 미세하게 미끌거리는 기분을 견디지 못해 토하는 지경이었던지라 물을 마시는 게 곤욕이었다.

축 늘어져서 그저 침대에 누워있던 때, 엄마가 멀리 사셔서 상할까 싶어 그리운 음식을 선뜻 부탁할 수 없었고 물이라도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음에 속상했다. 그 당시 남편은 탄산 음료를 당장 끊기가 어려워서 탄산수를 마시곤 했는데, 어느 날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보고 이거라도 한 번 마셔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뚜껑을 따고 한 입 들이킨 순간 이게 웬걸, 임신으로 속이 자주 메스꺼운 나에게 탄산수는 생명수였다. 탁 쏘는 그 느낌을 싫어해서 탄산이 들어간 음료는 거의 마시지 않던 내가 탄산수에 눈을 뜬 것이다.

평소에는 차가운 탄산수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마셨고, 소화가 되지 않는 날에는 한살림에서 사온 매실청을 타서 마셨다. 약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임신 기간 내내 매실청을 넣은 탄산수는 나에게 천연 소화제요 힐링 음료였다. 나중에는 당도 때문에 자주 먹지 않았지만 조금만 먹어도 체한 기분이 들던 날들에, 여름 밤 산책과 함께 내 속을 지켜준 것은 매실 탄산수였다. 그 해 여름 만났던 탄산수에게 지금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대망의 마지막 여름 음료는 요즘 내가 마시는 '레몬수'이다. 매일 아침 빈 속에 마시면 좋다고 하던데 나는 속이 쓰려 그렇게는 마시지 못하고 식후에 레몬물을 마시며 시작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미지근한 물에 레몬 원액을 원하는 만큼 넣고 타서 마신다. 처음에는 이게 뭐 그렇게 효과가 있겠어 하면서 반신반의 했지만 마실수록 몸도 가벼워지고 안색도 나아졌다. 물론 피부과에 가서 의느님이 박피를 해주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냥 물을 마시기 싫어하는 내게는 좋은 선택이었다. 레몬의 새콤하고 향긋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내 마음의 밝음이 1도 정도 올라가는 느낌이라 개운하다. 그 노란 액체가 뭐라고 사람을 도와주나 싶은데 벌써 2병을 다 먹어가는 이 시점에는 레몬이 나의 무거운 여름을 도와준 게 맞구나. 여전히 도와주고 있구나 생각이 든다.


이번 글을 쓰며 발견했다. 한 사람이 어떤 음료 한 잔에 이런 저런 기억을 풀어놓을 수 있다는 건 실로 멋진 일이구나! 더 젊을 때는 간혹 먹고 마시는 '취향'이라는 것이 단순히 멋지게 보이는 수단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는데, 편견이었다.

글에 써 놓은 세 잔의 여름 음료는, 커피를 마시면 잠이 잘 오지 않아 비상 사태 일때만 마시는 나같은 이에게, 소중한 보석과도 같다. 첫 잔은 어린 시절의 포근한 추억을 상기시켜주고 두 번째 잔은 아이를 가졌을 때의 기쁨만큼 어이없게도 울적했던 임신 기간을 위로해주었으며, 마지막 잔은 현재의 나를 조금 더 밝게 살아가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오늘부터라도 카페에서 만나는 약속이 있다면 내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보아야겠다. 그 사람의 한 잔 속에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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