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서

96부터 100까지

by 여름

96.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장바구니에 넣어 둔 다섯가지의 물건 중에


두 세가지 정도는 빼어서


가족이란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것



마음에 드는 세 개의 물건 중에


한 가지 정도는 취소해서


가족이란 사람들의 빚을 갚는 것



사는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고


구질스럽게 차마 뻥 칠 수 없어서


가족이란 사람들이 가끔은 힘에 겨운 것


97.

계절이 오직 하나뿐인 나라에서


사랑은 잔인할 것 같다.



쉰내 나는 코 끝에


젖어드는 셔츠로 물든 여름 내내


깨질 듯 시린 콧날을


굽어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겨울 내내



당신 생각이 날테니까.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사랑은 좀 쉬울 수도 있겠다.


봄에도 좋아하고 여름에도 좋아하고 가을에도 좋아했던


당신을


겨울에는 안 좋아해 볼 수 있으니까.


적어도 그건 할 수 있으니까.


98.

나는 우연찮게 왼쪽 검지 손톱이


예쁘게 잘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일년에 몇 번 보지 못하는 달걀모양 손톱


얼굴이 동그래, 손톱이 예쁘고픈 나에겐


이 시시함도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머리를 대충 쓸어 묶었는데


몇 십분 손을 정성스레 놀리며 노력했던 날보다


좋았다거나


매니큐어 칠하는 붓질이 한큐에


매끄럽게 끝났다거나



내 의도와는 별 상관없이 좋은 날


꼭 그런 날은 혼자다.


인생의 아이러니


우연의 심술궂음


99.

괜찮아지는 게 아니다.

그냥 흐려질 뿐이다.

모든 것이


100.

나는 늘 생각한다.

은근히 타는 불씨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불꽃놀이 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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