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간

25.05.17 일기

by 여름

살면서 if가정문을 고3수험생 때 문법 강의 들었던 것만큼 버금가게 많이 들은 경험은 아기를 낳은 후인 것 같다. 아기 수유텀이 3시간만 되면, 아기가 통잠을 자면, 아기가 뒤집기를 하면, 아기가 기기 시작하면....이렇게 끊임없이 아기의 발달 단계가 거쳐가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자유와 속박의 돌고도는 굴레는 웃음과 눈물의 근원이었다.

이제 드디어 친구들이 말하던 '너도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면'까지는 도달했는데,

'낮잠까지 자주면'의 국면에서 막혔다. 낮잠 시도를 하려는 주마다 고약하게도 아기가 열이났기 때문이다. 낮잠 이불이 한 달 반 동안 방치되었고 결국엔 안 잔다고 버티다가 갑자기 무력하게 잠이 든 아기 덕에 등원 후에 하루 6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이번 주부터 생긴 여유에 나는 무엇을 했나 돌아보니, 우선 미뤘던 여름옷 정리를 했다. 단순히 넣고 빼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탁기 5번을 돌려가며 다시 각각 색깔별로 빨고 퀴퀴한 냄새를 빼서 가지런히 정렬해두는 데에 하루가 걸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사오면서 대충 방치해둔 서랍장, 작은 방, 싱크대 수납장을 정리했다.

아, 유팡(젖병소독기)도 처리하려고 관리실에 문의하고 묵은 짐들도 다 내다버렸다. 남편 몰래 남편의 최애이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는 촌스러운 옷들도 이번 참에 속시원히 해결했다.

이렇게 며칠 반복하니 아기가 낮잠을 자고 와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데리러 가기 전, 누워서 1시간 정도였다. 등원시키고 그 길로 나가서 한 시간 정도 걷고 돌아와 집정리하고 저녁에 먹을 것 세팅하고 빨래 돌리고 내 점심까지 먹으면 이미 훌쩍 오후였다. 운이 좋아서 집안일이 적으면 책을 앉아서 좀 보거나 멍하니 남들은 어떻게 사나 혹은 어디를 여행갔나 유투브 세상을 탐험했다.

그러니까 새벽부터 복작대며 하루의 시간을 벌어보고자 움직이지 않는 한, 나에게는 많게 서너시간 적게는 30분 주어지는 게 현실이란 걸 확인한 셈이다.

막상 나의 하루를 돌아보니 좀 허무했다. 천국이며 신세계라는 어린이집 등원 성공과 엄마의 자유라는 큰 명제가 사실 까서 보니 너무 자그마한 조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루종일 집에 끼고 있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만요.)

집안일을 좀 미루고 내 자유를 즐겨도 좋긴한데 그 자유를 즐기면 다음 날의 나에게는 그만큼의 자유가 사라지는 아이러니. 조삼모사...뭐 이런거라고 할 수 있겠지.

이쯤되니, 나의 엄마의 시간은 어떠하였나 생각해봤다.

계절별로 방마다 갈아졌던 커튼, 깨끗한 이불, 전기팬에 구운 수제조미김, 무른 딸기 사와서 만들던 딸기잼, 엄마가 손수 만들던 간식들 쑥개떡, 고구마맛탕, 엄마표 피자...전자레인지가 있어도 가끔 먹게만 해주던 냉동식품 피자, 핫도그를 생각하면 엄마도 참 유난이었다 싶은데, 그게 사랑이었겠지 싶다.

지금 백번 이해해서 사랑이라고 포장을 해도 막상 살림을 살며 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엄마의 노동은 가히 충격적으로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젊고 부지런했던 엄마가 가엾고 엄마에게 죄송하다. 나라면 진작 엄마직 사표를 썼을 테니까.

아는 분이 나에게 그래서 한 나절의 자유가 생기니 뭘 제일 하고 싶어요? 라고 물으셨다.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우선 미션 임파서블을 보러 갈거라고 답했다.

본 시리즈나 니암리슨이 나오는 액션을 좋아하는 나에게 톰 크루즈 오빠는 도파민의 절정이겠지 싶어서 말이다. 아기를 키우며 한동안은 디즈니나 넷플릭스를 봤지만 그것도 얼마지나지 않아 끊어버렸다. 왜냐? 집중해서 볼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 다시 넷플릭스만 한 달 정도 구독해서 내가 못 본 '폭삭 속았수다'와 '천국보다 아름다운'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게 나의 목표이다.

물론 작년 여름에 사둔 빨간모자 선생님의 영어책이 나를 째려보긴하지만 말이다.

(영어공부는 하반기부터가 국룰 아닌가요? )

누구나의 시간은 귀하다. 나의 시간, 남편의 시간, 다른 가족들의 시간, 그리고 자라느라 애쓰는 나의 작고 작은 아들의 시간까지도... 그래서 누군가가 시간을 내어준다는 걸 감사하게 여기고 마음을 써 준다는 걸 당연히 여기지 않으려 생각한다.

(그러기엔 남편에게 T를 거두고 F를 보여줘야 할텐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네.)

내가 경험한 엄마의 시간표는 늘 바뀌고 특히 주변에 의해 결정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나 스스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모래시계에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스르륵 하고 금방 흩어져버린다. 아까비..하는 찰나에 다 떨어진다는 말이죠.

어린이집에 다닌 후 한 달에 한 주는 꼭 아파서 집에서 아기와 복작이던 걸 생각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진짜 서너 시간이 황금에 버금간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인생에 주어진 것들이 늘 그렇듯, 무심하게 살 때는 모르지만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 오늘이 바로 얼마 전 내가 바라던 자유와 행복이니까. 나의 노력없이 기꺼이 선물로 주어진 날일테니까. 그러니까, 잊지말기로 하자 내일의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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