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서

186부터 190까지

by 여름

186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

나를 망치는 것


나를 달뜨게 하고

나를 주저앉히는 것


모두 작은 것들이다.


부스러기와 먼지같은 것들


늘 감지하지도 못하면서

결정적일 때 방아쇠를 당기는

고약하고도 소중한 것들


187

찰랑거리는 슬픔이 넘칠까봐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

밤의 신호등을 건너고


적당한 온수를 부어 달래보려해도

끈질기게 차가운 마음은

한 주의 다정함을 다 써버렸다고

낮의 건널목 앞에서 멈춰선다.


불안하고 매정한 하루 속에서

아무일 없는 듯 색을 띠지도

체취도 내지 않지만,


정작

각자는 초록빛 신호가 바래서

노오란 경고등을 반짝이는 중이다.


마음에 찰랑거리는 한 뼘의 무거움이

쌓이면

제발

애써 견디지 말고

인생이 잠깐 출렁여도 좋으니

차라리 파도가 되어

바위같이 딱딱한 남이라도

때려주기를


그대의 찰랑거림은

어느 시절 긴 머리와

처음 손 잡은 청량함에만

어울리는 말이니까


188

몸도 마음도 웃긴게

쓰는 놈이 잘 쓴다.


긴 연애 공백기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람이 몸도 마음도

휴지 상태로 버튼을 눌러

오래도록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약아서 계산 때리느라 눈만 높아서

라고 말하지 말아줬으면


자동차도 겨울이면 시동을 켜고

예열을 하는데

기계도 그 잠깐의 차가움을 버티려고

그렇게까지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자신만의 해빙기가 지나서

다시 숨을 고르고 발자국을 떼는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너의 인생은 오래 걸리는 장편이니

너를 단편 수필집이라고 말하며

탓하는 인간들은 그만 덮어도 좋다.


189

sns나 대화중에서도

괄호를 열고 이하생략 괄호 닫고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서로의 괄호 속을 들여다 보지도 못하면서

다른 이의 처지를 쉽게 가늠하고

나보단 낫겠지 하며

너 사는 건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괄호의 내용을 굳이 궁금해하지 않으면서도

너의 일상이 충분히 희노애락으로

춤추고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으로 마음에 담고

쉽게 말 꺼내지 않는

적당한 온도의 다정함과 무심함


늘 스스로 바라면서도

도대체가 내가 얼마만큼 왔는지

측정이 어려운 것


그래도 살다보면 나아지려나

매너는 정말 사람을 살리고

인생을 포근히 덮어주는게 분명하다.


190

준비가 되면

달려나갈 수 있다고 늘 생각했다.


방향을 감지할 것은

염두에 두지도 못 하고


여러가지 준비로 중구난방

들고 뛰다가

땀에 젖어 풀썩 주저 앉다보면


별 준비도 없던 녀석들이

갑자기 부앙 소리를 내며

질주를 시작한다.


땀을 식히고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길은 꽉 차고

내가 달려갈 차선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가 우연히

샛길로 들어선 어느 날

그게 이 쪽으로 가는 길이 맞던가

갸우뚱하면서 헤맬 때


내가 원하던 이정표가 나오며

아직 채 자갈들을 치우지 않은

구불구불 세상이 열리기도 한다.


빠른 속력을 내는 녀석들의

뒷 꽁무니를 보며 울던 날들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샛길로 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남들이 우습게 여기고

폄하하던 일들도

내가 가장 빛나는 별을 찾아가기 위해

지나치는 별자리 꼭지점이니까

나는 나를 사랑해주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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