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 취향과 1200년의 육식금지 사이
제 친구 J는 7년 차 대한민국 공무원입니다.
평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 주말 주일에는 추가 근무 아니면
직장상사 골프나 산행 동반은 물론,
주변 사람들 결혼식에 돌잔치까지 알차게 두 탕, 세탕 시간표를 짜서
얼굴을 비치고 축의금도 적당히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낼 줄 아는 여자.
그런 그녀에게 가장 스트레스는 일도 직장상사도 아닌,
바로 부모님의 결혼 걱정 때문에 나가는 소개팅 혹은 선 입니다.
" 진짜, 내가 '왕돈가스에 사라다' 이야기하는데 그 남자, 표정을 싹 구겼다니까?
아니 왕돈가스가 무슨 죄야. 사라다랑 크림수프는 무슨 죄고.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지가 도쿄에서 먹었다던 그 돈가스만 돈가스야? 지가 경양식을 알아? 왕돈가스로 맞아봐야...."
아무래도 이번 선 본 남자도 어려울 거 같아요. 불쌍한 우리 J. 불쌍한 왕돈가스.
J는 지난주 선 본 남자 이야기를 한창 전화로 쏟아붓었고, 그 말을 듣던 저는 이렇게 답했죠.
"야, 근데 너랑 돈가스 이야기하니까 돈가스 먹고 싶다-."
돈가스 좋아하시나요?
'돈가스 좋아하시나요?'
저는 벌써 돈가스 생각만 해도 입에서 침이 고이네요.
빵 결과 두툼한 속살이 살아있는 일본식 돈가스부터, 그리고 집에서 꾹꾹 눌러서 만드는 돈가스,
남산 밑에 그 유명한 집의 푹 적셔진 소스 맛이 매력적인 얼굴보다 더 큰 크기의 돈가스,
김치는 한 번 더 추가해 먹을 것 같은 카레 돈가스,
고구마와 치즈가 쭈욱 늘어지는 고구마 치즈 돈가스,
담백하고 개운한 나베 카츠, 먹으면 속이 든든해지는 돈부리 등등-
정말 돈가스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개인의 취향만 다를 뿐이죠.
저에게 '돈가스'라고 하면 사실,
엄마가 명동에서 레슨 끝나고 데려간 '명동 돈가스'가 가장 먼저 생각나요.
어릴 때, 명동성당에서 오르간 레슨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모든 어린이들이 그렇듯,
친구들이랑 더 놀고 싶어서 정말 몸을 비틀다가 엄마한테 끌려가듯이 갔었거든요.
그러다, 엄마가 어느 날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하셨어요.
"레슨을 끝까지 잘 받고 칭찬까지 들은 날에는 너 좋아하는 돈가스 사줄게."
그래서 저는 정말 한 번도 안 빠지고 레슨을 열심히 갔어요. 네. 돈가스는 가끔 먹은 적도 있고요.
약 1200년의 육식금지
그런데, 이 돈가스 시작된 일본에서는 7세기 후반부터 메이지유신까지,
즉,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고 일본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약 1200년간 육식이 금지되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고, 개국 정책을 시작한 일본에는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서양인과 매우 큰 체형 차이가 나는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을 '고래'에 자신들을 '정어리'라고 비유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차이를 극복하고 동시에 서구 문명을 무리 없이 도입하기 위해서 육식을 지도층에서부터 장려하게 됩니다. (1872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키야키'와 '쇠고기 전골' 같은 요리들이 바로 육식을 장려하면서 고기를 저항감 없이 먹기 위해 가장 초반에 등장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1200년 가까이 안 보던 것을 먹자니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모르고 , 또 서양 음식의 가격은 비쌌기 때문에 서민들은 접하기 어려웠고 천황 및 지도층, 지식계층이 주로 맛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돈가스는 그로부터 60년쯤 후인 1929년, 고기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시기에 등장하게 됩니다.
춥지 않게 옷을 잘 입혀주는 거야.
알겠지?
" 돼지고기 안심이나 등심을 고기 망치로 이렇게 살살 두드려 펴준 뒤에, 소금 후추를 살살 뿌려줘.
앞뒷면 골고루 말이야. 그다음에 다진 마늘, 강판에 간 사과랑 맛술을 섞어서 고기를 덮어주고
잠깐 쉬게 해야 해. 15분-30분쯤 있다가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를 넓은 볼에 준비해줘.
넓은 그릇도 괜찮고.그리고 밀가루-계란물-빵가루 순으로 돼지고기에 옷을 차곡차곡 입혀주면 돼.
빈 곳이나 너무 뭉친 곳 없이 잘 옷을 입혀주고, 빵가루는 특히 조심히 이렇게 꾹꾹 눌러가면서
골고루 입혀줘야 돼. 춥지 않게 옷을 잘 입혀주는 거야. 알겠지?"
엄마와 싱크대에 닿기엔 너무나 작았던 동생은 자기 의자를 가져와 조물거리는 손으로 돈가스를 만드는 시간.
빵가루 옷을 입히는 제 작은 손 위로 겹치는 엄마의 따뜻한 손끝과 목소리가 유난히 그리워지는 날에는 시간을 들이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돈가스를 만들어 봅니다.
지난번 한국행 때, 엄마와 함께 다시 갔던 명동의 그 길목들도 생각나고,
조금 넉넉한 양으로 만든 이 돈가스들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눠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음식 같이 해 먹고 나눠먹는 그 정이 문득 그리워져서 이 글을 써봅니다.
그나저나 J야. 다음에는 만나면 돈가스 만들어 줄게. 너 좋아하는 치즈도 넣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