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메뉴
학교 다닐 때 급식 좋아하셨나요?
최근에 본 신문 기사 중, 장어덮밥, 랍스터 같은 메뉴를 고등학교 급식메뉴로 내놓아 화제가 되었던, 한 영양사분이 대기업 사내식당으로 이직을 했다는 소식을 보았어요. 얼마 전 '독도의 날'이라고 '독도' 모양 케이크가 학교 급식에 나와 학생들이 인증샷을 올린 사진 들도 보았고요. '정말 세상에 많이 달라졌구나' 하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 ' 밥심' 에 대해 참 각별한 것 같아요. 제 친구 중 하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회사 밥이 맛있어서 그나마 회사를 못 그만둔다'는 말도 하더라고요.
사회에 나와서는 '오늘 뭐 먹지'를 스스로 고민하기도 하지만, 학교에 다닐 때를 생각해보니 급식 식단표에 형광펜을 칠하며 '오늘의 급식메뉴'를 공유하던 친구 하나쯤은 반에 꼭 한두 명씩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유난히 '수요일' 메뉴가 맛있는 게 많았던 것으로 기억나요. 그래서 수요일이면 '누가 먼저 배식을 받게 되는지'가 정말 큰 관심사이자, 또 종종 책상 밖으로 발을 빼꼼히 내밀고 있다가, 수업 종이 치자마자 치타마냥 후다닥 뛰다가 우당탕탕 넘어지는 친구들 한두 명 때문에 웃었던 기억도 나요. 모두가 좋아했던 그 수요일에는, 짜장밥에 튀김만두가 나올 때도, 돈가스가 나올 때도 있지만, 그리고 저는 '수요일의 카레라이스'를 좋아하는 볼빨간 여학생 이였어요.
특히, 집에서 엄마가 카레를 만드실 때는, 정말 한 솥 가득 끓였던 기억이 나요. 편식이 심한 남동생이 평소보다 야채를 더 먹게 되는 메뉴였고, 바쁠 때는 밥만 데워서 카레를 비벼, 김치만 반찬으로 있어도 충분한 한 끼가 되기도 하니까요. 카레가 남으면 집에 남아있던 돈가스나 우동, 라면 사리 같은 것을 올려 먹으면 또 다른 메뉴가 되기도 하고, 생선 비린내에 유난히 약한 저를 위해 집에서 생선을 프라이팬에 구울 때 엄마가 튀김가루나 밀가루에 살짝 카레를 묻혀서 구워주셨던 터라 집에 집게로 밀봉을 해둔, 카레 가루가 늘 냉장고 오른쪽 칸 윗부분에 자리 잡았던 기억이 나요. 남동생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카레를 끓여놓고 나가시면 큼지막이 썰린 감자, 양파, 당근, 초록 피망 사이에 숨은 고기를 저와 동생은 몰래 둘이서 사이좋게 건져 먹고는 모르쇠로 발뺌했던 했던 기억들도 카레의 그 노오란 빛을 볼 때면 떠오르곤 해요.
카레라이스
오늘은 며칠 전 고랑이가 로스트 치킨(전기통닭)을 사 와서 먹고 남은 뼈로 우려낸 닭 육수와 남은 닭고기 살점을 이용해서 한국식 카레를 끓여보기로 했어요. 인도식, 네팔식, 태국식 커리를 좋아하는 고랑이에게는 또 다른 한국식 카레를 소개해 주고 싶었거든요. 싹이 살짝 올라와 쓰윽 도려내어 깍둑썰기한 감자와 샐러드 만들고 남은 양파, 달큰함이 아직 남은 당근, 그리고 피망 대신 맵지 않은 고추, 제가 좋아하는 간식 메뉴인 방울토마토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닭 육수를 넉넉히 끓인 터라, 밥을 새로 하는 김에 닭 육수와 껍질을 까서 준비해 놓은 콩(브로드 빈)을 넣고 밥을 하기로 했어요.
기름을 두르고, 마늘과 양파를 넣고 볶아줍니다. 감자가 익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는 터라 양파를 넣고 양파에서 어느 정도 익으면 바로 감자를 넣고 함께 볶아줍니다. 생고기를 쓰면 양파와 함께 밑간을 해 둔 고기를 볶아서 준비하지만, 오늘은 이미 익힌 닭고기 살점을 쓰는 터라 이 부분은 생략합니다. 어느 정도 야채가 볶아진 듯하면 저는 불을 줄여서 카레 가루를 넣고 빠르게 야채들과 볶아준 뒤, 준비해둔 닭 육수를 부어주고 센 불로 끓여줍니다.
한번 푹 끓여진 육수에 한 번 더 카레 가루를 넣어 농도를 맞춰주거나 액젓으로 간을 해준 뒤, 불을 줄여서 이제부터 뭉근하게 끓여줍니다. 아, 액젓은 정말 의외지만 참치액도 좋고, 집에 김치 해 먹고 남은 멸치 액젓도 좋아요. 소금으로 하는 간보다 감칠맛이 확 올라오거든요. 저는 너무 물컹한 당근이나 피망 식감을 좋아하지도 않아서, 어느 정도 카레가 완성되면 불 끄기 2~3분 전 정도에 남은 야채들을 넣어줘요. 냄비와 카레에 이미 깃든 잔열까지 이용해서 이렇게 익혀주면, 색깔로 예쁘고 식감도 살아있어서 몇 번 데워먹어도 너무 물컹하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카레를 끓여놓고 담기 전까지 실온에서 충분히 식혀 줍니다. 바로 먹어도 맛있지만, 오늘은 저녁으로 왠지 뜨끈하게 닭 육수로 갓 한 밥에 포근포근하게 카레를 올려서 김치까지 얹어서 한 입 먹으면 '오늘 하루 수고했다'라고 스스로 말하며 하루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해가 넘어갈 때쯤, 집으로 돌아와 닭 육수에 불려놓은 쌀로 밥을 짓고 카레를 한 번 더 데워봅니다. 그새를 못 참고 카레를 끓이기 전에 감자와 고기 한 점을 한 입 떠서 먹어보았는데, 카레 향이 쏙 베어서 정말 맛있게 저녁밥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오란 카레 색이 겉 부분 뿐만 아니라 닭고기와 감자의 하얀 속살 안쪽까지 쏙 베어서 '내가 했지만 맛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콧노래를 부르며 잘 익은 김치를 꺼내고, 맥주와 소주의 밥을 챙겨준 뒤, 밥 한 주걱과 카레 한 국자를 푹 퍼서 살포시 그릇에 얹어줍니다. 한 그릇이 금세 사라지고, 두 번째 그릇을 반쯤 비울 때쯤 김치가 모자라서 식탁을 일어났는데 일이 막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고랑이가 맥주와 소주(고양이들)가 킁킁거리듯 주방의 냄새를 감지하며, 수저를 하나를 더 주방 서랍에서 꺼냅니다.
"이 익숙한 냄새는 뭐지?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고랑이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과 킁킁거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그날이 생각납니다. 엄마가 저녁을 만드는 날이면, 놀이터에서 놀다가 손도 안 씻고 들어온 남동생과 제가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와 킁킁거리며 저녁 메뉴를 알아맞히던 게임을 하곤 했던 그 저녁 시간들. 서로 돼지, 닭, 강아지 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놀던, 두 어린 남매를 보며 웃던 엄마의 따스한 눈빛을 기억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