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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Nov 27. 2020

언니표 된장찌개

늘 손발이 차고, 추위에 약한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매서운 겨울 추위가 너무 싫어서 크면 그녀가 좋아하는 동화에 나오는 제비와 함께 남쪽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나, 늘 따뜻한 날씨에, 버스정류장에서 코알라와 캥거루를 만날 줄 알았던 남쪽 나라에 도착한 그녀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영하의 공기 사이로 맥도날드에서 나는 기름 냄새, 커피 냄새를 맡으며 두꺼운 청색 코트 깃 사이를 여미며, 복실복실한 회갈색 목폴라에 코를 묻고서야 생각합니다.


'아, 과학 시간에 남반구와 북반구는 계절이 반대라고 했지. 남쪽 나라는 8월이 겨울이구나.'





혹시나 마음이 약해지면 한국에 가려고 하지 않을까 싶어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도 없이, 한 달 치 월세만 들고 시작한 호주 생활은 그 예상치 못한 날씨보다 더 춥고 혹독하게 하루하루가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가족들에게는 호주에 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왔지만, 사실 이 넓은 호주 땅에는 먼 친척은커녕 친구조차 없이 혼자 덩그러니 무슨 용기로 갔는지 저도 지금은 저 자신이 참 궁금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웃어넘기지만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제가 다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도 늘 그렇듯 운이 좋아서 타지에 도착한 첫 주에 일을 구하고, 도착한 지 한 달 때쯤 되어 저에게는 '언니'가 생깁니다.


나의 언니


아는 동생의 소개로 알게 된 한국 언니. 긴 생머리에 서글서글하고, 다정다감하며 일도 잘하고, 어쩜 그렇게 맛있는 음식과 간식들을 찾아서 소개해주는지 참 신기하고 예쁜 언니였어요. 겨울날에도 여름날에도 늘 화사하고 좋은 꽃 냄새가 나는 언니. 둘 다 비슷한 시기에 호주에 와서, 서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하며 한 끼의 위로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인연으로 호주에서 함께 잠시 일도 하고, 제가 한국에 돌아와 직장생활에 정신없는 시간에도 꾸준히 연락하고 만나다가 4년 뒤, 언니와 저는 함께 집을 구해서 3년을 같이 살 게 됩니다.


언니가 제 생일날 차려준 미역국

함께 가구를 조립하고, 한 푼이라도 아껴야겠다고 장을 알뜰하게 보고, 대청소를 날 잡아서 하고, 서로의 연애로 눈물을 쏙 빼고 일로 스트레스받는 날에는 유난히 밥을 맛있게 차려서 먹거나 외식을 하기도 했어요.  키친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때로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직업이고, 늘 저의 들쭉날쭉한 스케줄에도 그녀는 '남의 밥 차리느라 제 밥은 못 차려 먹는' 저를 위해 맛깔스러운 언니 표 '김치'와 '제육볶음' 그리고 '언니의 된장찌개'를 해서 저를 맞이하곤 했어요. 참, 신기하게도 언니가 '제육볶음'을 한 날에는, 아무리 바빠도, 혹은 일이 갑자기 일찍 끝나서 언니 얼굴을 보며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생겨서 신기해하기도 했죠. '내가 진짜 먹을 복이 있나 보다' 싶으면서요.


언니표 된장찌개

열여덟 살부터 자취를 했던 저에게 언니는 가족이자, 친정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언니네 부모님이 저희 집에 오셨을 때는 마음이 따뜻하게 가득 은총이 스며드는 것 같아서 가슴이 짜르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언니는 그동안 알뜰하게 생활하고, 꾸준히 돈을 모아서 자기 집을 마련해서 예쁘게 새 출발을 시작했어요. 


언니의 싱크대 선반을 언니와 잘 어울리는 예쁜 핑크빛으로 페인트를 칠해줄 겸, 언니의 이사를 도와주러 갔는데 언니가 고맙다며 또 밥을 크게 한 상 차려줍니다. 그렇게 또 만난 언니 표 음식들은 정말 언제 어디서든 한술 뜰 때마다 제 가슴에 무언가를 녹여주곤 합니다. 이제는 언니와 함께 살지는 않지만, 늘 언니와 같이 해 먹거나 사 먹은 음식 사진들을 보다가 흉내를 내곤 하는 음식 중 하나는 '언니표 된장찌개' 예요.


직장을 다니면서 어머니 바쁠 때, 짬짬이 한 솜씨라고 하지만 뚝딱뚝딱하는 사이에 잡채, 불고기 같은 음식이 순식간에 완성되는 언니의 손맛은 정말 ' 진짜 맛있는 한국 엄마의 집밥 표준'이어서 고랑이에게 종종 자랑하곤 했거든요. 특히나 지난번 언니가 고랑이와 저를 초대해 먹은 한 상에 차려진 '언니표 된장찌개'는 한 번 맛보더니 저에게 맛이 끝내준다며 언니에게 꼭 '된장찌개의 비법'을 배워오라는 숙제를 던져줍니다.



재료를 이렇게 썰어두고 준비하면 마음이 단정해집니다.
유자 마카롱: 언니, 고랑이가 언니 표 된장찌개가 맛있다면서 나한테 꼭 그 비법을 배워오래요. 

언니:응? 비법 같은 거 없는데. 된장은 한인 마트에 파는 현미 된장 사서 썼고, 육수 팩 있으면 그거 쓰고. 아, 고추장을 조금 풀어서 써. 야채랑 두부는 너도 다 아는재료이고.

유자 마카롱: 거기에 손맛 한 스푼, 사랑 한 스푼이 그 맛의 비결이네요.



그렇게 언니에게 배워온 팁으로 고랑이가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고 하는 날, 그리고 언니가 보고 싶은 날에는 된장찌개를 끓여봅니다. 쌀뜨물을 받아서 다시마와 멸치, 야채로 육수를 내고, 집에 준비해 놓은 야채들을 가지런히 썰어서 된장을 휘휘 풀고, 고추장을 작은 티스푼으로 하나 정도 집어넣은 뒤 한소끔 끓여줍니다. 


우거지를 더 넣기도 하고, 무를 나박나박 썰기도 하고, 재래식 된장 남은 것에 들깻가루를 개어서 끓이기도 하고, 새송이나 표고버섯이 세일중이면 버섯을 넉넉히 넣기도 하고, 한국 애호박을 운 좋게 발견하면 꼭 반 토막만큼은 아껴두었다가 된장찌개에 넣곤 합니다. 언니표 된장찌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랑이 엄지손이 늘 척 올라가는 메뉴가 이 된장찌개이다 보니 집에 된장이 벌써 3가지 종류가 되어서 요즘 냉장고 위 칸을 차지하고 있어요.


언니랑 함께 나눈 것은 된장찌개라는 음식만이 아니겠죠. 젖살 통통할 때 만난 20대 여자아이 둘이 어디서든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나 자신의 인생을 잘 끌어가며 살아가겠노라 북돋아 주고 함께한 시간의 힘이 우리를 지금도, 앞으로도, 지켜줄 힘이 될꺼라 생각해요. 그래서 늘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마음 맞는 이와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 

허기를 만을 채우지 않고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음식,

그리고 짧지만 진심이 담긴 대화 같은 것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만드는 그 버팀목이 

가장 오래 걸리지만 가장 튼튼한 인생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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