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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Dec 02. 2020

누나, 행복하게 편하게 지내.

큰놈:  누나, 그거 기억나? 왜 예전에 나 진짜 죽겠다고 술 처먹고 뻗은 날 있잖아...

유자마카롱: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잊어버리냐. 내가 과외 경력 10년 중, 흑역사인데. 진짜 그날 수업은 커녕, 술 취한 학생 해장국을 끓여주는 건 살아생전 처음 있는 일이였어…. 어휴…. 그날 진짜 너 술에 몸을 절인 줄 알았다.

큰놈: 그날 누나가 무슨 국 같은거 끓여준거. 진짜 대박이였는데.

유자마카롱:  그건 내 남동생도 끓여준 적 없는 거야. 넌 진짜 내 덕에 사람 된줄 알아 ㅋㅋㅋ 참, 가족들 다 건강하시지?



큰놈은 제가 한국에서 과외를 할 때 만난, 저보다 한 살 어린 과외학생이였어요. 수업한 시간보다 말싸움하거나 잡으러 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학생이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둘도 없는 애처가 이자 아이 둘과 함께 한 집의 멋진 가장으로써 잘 지내고 있어요. 큰놈이 아직도 그 국을 기억할 줄을 몰랐는데, 참 신기하더라고요. 저랑 수업했던 내용은 다음날도 까먹던 녀석이었는데.  아, 그 국이 뭐냐고요?


명란 토마토 계란국


이 국은 사실, 제가 가끔 혼자 술 한잔을 하다가 출출 하면서 국물이 당길 때 먹는 음식 중 하나예요. 예전에 찬밥에 물을 말아서 명란젓을 올려서 밥을 먹는 저를 보더니, 중국 친구가 토마토랑 달걀을 볶아서 밥반찬을 만들어 준 적이 있는데 이걸 국물요리로 먹어도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라면만큼이나 간단해서 재빨리 끓여서 혼자 훌쩍거리며 먹다 보면 땀이 바작바작 나는 음식이에요. 국물만 먹어도 속이 든든하고 풀리지만, 찬밥이 있으면 마지막 그릇에 꼭 밥을 말게 되는 음식입니다.





냄비에 다시마 작은 한 조각과 물을 넣어서 끓여줍니다. 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며,  토마토 하나, 양파 반개, 명란은 한 토막을 손가락 반마다 정도로 잘라주고, 파와 매운 고추는 양껏 썰어줍니다. 달걀은 1인 기준 2~3개 정도를 잘 풀어서, 소금 후추 맛술을 넣어 달걀 물을 준비해줍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다시마를 건져낸 뒤, 다진 마늘 한 스푼과 함께 준비된 토마토,명란, 양파를 넣고 2분 정도 끓여줍니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뒤, 마지막에 계란 물과 파, 매운고추를 넣어서 30초 정도 끓으면 완성됩니다. 맛술을 넣기도 했고, 이렇게 빠른 시간에 계란을 익혀줘야 계란이 계란찜 계란처럼 부들부들 보들보들 먹기 좋은 식감이 됩니다. 계란 물을 넣은 뒤 휘휘 젓게 되면 좀 더 계란국 같은 식감이 완성되기도 합니다.




이 국을 오랜만에 끓이다 보니, 문득 그 당시 큰놈 집의 냉장고가 생각납니다. 언제 먹고 남은 지 모르는 족발 사이에 그나마 쓸만했던 새우젓 남은 거, 물컹물컹해 보이는 방울토마토와 딸기, 먹다 남은 와인 같은 것들 사이에서 재료를 찾아 이 국을 부족한 듯하게 끓여준 기억이 나는데, 그래도 맛있었다니 추억이 바로 맛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자가치유능력


발그레한 볼에 부끄럼이 많았던 어린 시절에도, 사랑이 왔다간 자리가 여전히 불구덩이처럼 뜨거워 불똥만 봐도 뜨끔한 청춘에도, 집에서든 밖에서든 이 자리가 내 자리가 같지 않고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건가 싶을 때에도 우리는 그 시간마다 자신을 돌보는 각자 '자가치유능력'을 꺼내 쓰곤 합니다.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고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혼자 오롯이 천천히 삭혀야 하는 시간이 돌덩이마냥 마음을 누르다 못해 온몸에 짜르르 짜르르 진동이 오는 것 같으면, 저는 아주 가끔 이 명란 토마토 계란국을 안주 삼아 혼자 술을 한잔하곤 하거든요. 이 작은 한 그릇은 제가 20대에 찾은 저만의 '마음 처방법'이랄까요. 


그렇게 자가치유능력을 키워나가는 동안, 세상이 죽도록 싫었던 누군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아빠가 되고, 앞길이 늘 깜깜했던 누군가는 부하직원들을 잘 끌어주는 좋은 직장 선배가 되며, 사랑의 상처가 가장 무서웠던 누군가는 좋은 동반자와 매일 저녁을 함께 먹으며 따뜻하게 살기도 하니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 만난, 저에겐 늘 망아지 같았던 친구와 이젠 30대가 되어 오랫만에 꽤 긴시간 통화하다보니 막 끓인 명란 토마토 계란국에 소주 한잔을 걸친 듯 속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오랫만에 혼자 술 한잔을 걸칠까 싶었던 마음을 달래며 꺼내놓았던 술잔을 통화를 하며 슬며시 다시 찬장 안으로 집어 넣어봅니다. 오늘은 이 대화로 마음이 충분할 것 같거든요.


유자 마카롱: 나중에 하루 우리 집 놀러오면, 그 국 해줄게. 예전 얘기 꺼낼 때는 옛날 음식 만한 게 없어. 
큰놈: 알았어. 누나, 행복하게 편하게 잘 지내.
유자 마카롱: 그래. 너도.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해장국인지 안주인지...가끔 저도 헛갈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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