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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Dec 09. 2020

2020년, 사계절의 위로와 격려의 레시피

새벽 4시. 평소처럼 알람 소리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봅니다. 고랑이는 샤워를 하는 동안, 저는 따뜻한 물 한 컵을 마시며 커피를 내리고, 간단히 맥주와 소주(고양이들)와 고랑이의 아침 준비를 해봅니다. 오늘은 평소같은 출근길이 아닌, 5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고랑이의 24년지기 친구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이여서, 고랑이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줍니다.




4주 전,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35년 전쯤인 프랑스에 계신 고랑이의 아버지가 코로나에 감염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난주, 고랑이가 호주에서 처음 사귄 24년 지기 친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작년 말부터 큰 수술을 준비하던 고랑이의 친구는 올해 코로나로 봉쇄기간 때문에 한 번, 또 병원 설비가 부족하여 또 한번의 수술이 미뤄지고, 그러다가 심장마비와 합병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떠나고 맙니다.


저는 한국에 계신 엄마의 건강 때문에 눈물짓는 일이 많았고, 무척 친했던 직장동료가 갑자기 암으로 떠났고, 모든 일이 맘처럼 쉽지 않아 속앓이를 할 때도 있고, 평소에 반도 안 되는 생활비로 생활을 하며 머리를 싸맬때도 있고... 모두가 그렇듯 2020년에 저희 커플의 삶에 힘든 일들을 찾아보기 시작하니 정말 끝도 없이 쏟아지는 것 같더라고요.


혼자가 아니여서 다행이야

그럼에도, 우리가 겪는 이 힘든 시간에 서로가 혼자가 아녀서 다행이라고 말을 해봅니다. '만약 네가 혼자 이 시간들을 견뎠다면 그게 더 가슴 아플 것 같다' 고요. 우리 사이에는 아이가 없지만, 우리가 서로 가슴속에 늘 품고 사는 우는 어린아이를 더 보듬고 살자고. 돈이 부족하면 아끼면 되고, 시간이 부족하면 더 좋은 시간을 아껴서 만들면 된다고. 늘 긍정적이고 웃으며 지낼 수는 없지만, 단단하고 좋은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보자고- 그래서 아주 작은 기쁜 일도 기념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종종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면, 우유나 계란, 혹은 과자 한 봉지 같은 것을 사러 슈퍼에 손잡고 걸어가 봅니다. 매일 똑같은 것 같은 골목길에는 하아얀 치자꽃이 더 곱게 피워 달큰한 향을 뽐내기도 하고, 길모퉁이에 초록 지붕이 예쁜 집의 귀퉁이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기도 합니다. 그 옆집에는 막 잔디를 깎은 풀냄새가 코를 찌르듯 느껴져 재채기가 날 것도 같은 그런 시간을 걷곤 합니다.



또 어떤 날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해변을 걸으며 조개껍질을 주워봅니다.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한창 찍다가 밀려오는 파도에는 슬픔을 하나둘씩 둥- 띄웠다가 멀찍이 보이는 수평선을 말없이 쳐다봅니다. 그렇게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얕은 물부터 저 멀리까지 온통 반짝거리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더 찬란히 빛나는 윤슬을, 반들반들 귀여운 조개껍질과 함께 고스란히 마음 한구석에, 작은 잼 통에 담아 집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1년’이라는 말보다는 ‘사계절’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알고 지낸 시간을 가끔 숫자로 몇 년을 세어보기보다 몇 계절을 함께 했는지를 세어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한 사계절. 코로나로 얼룩진 사계절이지만, 어쩌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매년 사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을 위로와 격려의 레시피들이 일상 속에 빼곡하게 적어 봅니다.


한여름, 퇴근하고 돌아오니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잔에 부어서 건네주는 시원한 맥주 같은 위로. 혹은, 토렴해서 뜨끈뜨끈함이 밥알까지 베어져 나오는 한겨울에 건네받는 국밥 같은 격려 같은 것들이요. 마음 아프게 돌이켜보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 어느 해 보다 그렇게 위로와 격려의 레시피가 계절마다 쌓여서 일상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며칠전에 주어온 조개껍질로 그려본 그림이예요.


오늘은, 어제 해변을 걷다가 주어온 조개껍데기를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말려주고, 잘 마른빨래를 반듯하게 접어서 고랑이의 서랍 칸에 잘 넣어둡니다. 그리고, 밤 늦게 장례식장에서 돌아올 고랑이를 위해, 오늘 날씨와 잘 어울릴 와인 한병과 조금은 집을 환하게 해줄 꽃 한송이를 사러 이따가 수국이 흐드러지게 핀 모퉁이를 돌아서 산책을 갔다오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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