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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Nov 24. 2020

밥솥 같은 행복

타지에 살다 보면 꼭 사고 싶지만, 조금은 망설이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밥솥' 같은 것들이요. 


동네 마트나 전자제품 파는 곳에 가면 '라이스 쿠커'라고 밥하는 기계는 꽤 합리적인 가격으로 살 수 있지만, 왠지 맛있는 밥을 먹고 싶어서 한인 마트에 가서 한국 쌀 까지 샀는데, 라이스 쿠커로는 한국 집에서 먹는 그 밥맛이 절대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맘먹고 살려고 하니 400불 가까이하는 밥통을 사려고 하니 쉽사리 지갑이 열리지 않고, '집에서 내가 밥을 해 먹으면 얼마나 해 먹는다고.' 하며 한 5년을 넘게 고민했어요. 그런데 저보다 한식을 더 좋아하는 남자와 살며 집밥을 먹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드디어 고민 끝에 결정합니다.


유자 마카롱: 고랑이, 우리 이제 정말 밥솥이 필요할 것 같아. 작년부터 모은 동전이랑 돈으로 살 수 있을꺼 같아.

고랑이: 그게 꼭 필요한 거야?

유자 마카롱: 응. 더 맛있는 한국음식 먹고 싶으면 이건 꼭 필요해. 한국 밥솥은 라이스쿠커 같이 밥만 하는 거 아니고, 같은 쌀로 밥을 해도 밥맛이 훨씬 좋아져. 수육도 또 해 먹을 수 있고, 빵이랑 케이크도 가능하고, 너가 먹고 싶어 하는 약식이랑 삼계탕도 제대로 해먹을 수 있어. 밥솥 사면 삼계탕 해줄게.

고랑이: 진짜? 삼계탕? 삼계탕 해줄 거야? 그럼 사자.


아니, 삼계탕에 이렇게 쉽게 고랑이가 넘어 올 줄은 몰랐거든요. 그렇게 고랑이를 꼬들겨서 한인 마트에 가서 장을 잔뜩 보고, 쿠*와 삼계탕 할 밑거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삼계탕


작은 크기의 닭은 키친타월로 적당히 물기를 제거한 뒤, 누린내가 날 수 있는 지방 부분을 가위로 제거해 줍니다. 그리고 소금, 후추, 다진마늘, 맛술을 닭의 겉과 안쪽에 고루고루 발라준 뒤, 삼계탕 키트에 든 대추와 각종 한약재, 밤, 마늘, 생강 그리고 불려놓은 찹쌀을 닭 속에 고루 채워 준 뒤, 이쑤시개를 이용해서 잘 여며 줍니다. 남은 삼계탕 육수 밑 재료( 양파, 파, 생강 등)를 함께 찹쌀을 씻은 쌀뜨물을 낙낙하게 밥솥에 넣어줍니다. 고랑이가 궁금해하는 베 보자기의 또 다른 용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저는 잘 불린 찹쌀과 잡곡을 베보자기에 넣어서 밥 주머니를 만들어 닭 옆에 넣어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쌍화탕 한 병을 쌀뜨물에 부어줍니다. 


이 팁은 제가 아는 '장금이 언니'가 알려줄 꿀팁이예요. 한인 마트에 쌍화탕이 있는데 잘 못 보는 경우가 많다며 장금이 언니는 꼭 한인 마트 직원분에게 물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삼계탕은 물론 수육이나 동파육 같은 고기 요리에 꽤 유용한 팁이라면서 눈을 찡끗했던 언니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제 밥솥 뚜껑을 닫고, 멀티쿡 모드로 설정해서 45분 기다리면 됩니다.



물에 빠진 닭


저는 어렸을 때, 삼계탕(=물에 빠진 닭)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바삭바삭 튀김옷에 야들야들한 살점, 풍부한 양념 맛이 가득한 치킨은 누구나 다 좋아하잖아요. 특히나, 어머니가 제가 몸이 차다며 삼계탕에 든 이미 물컹물컹 인삼이랑 대추를 꼭 먹게 했던터라 집에서 도망 다니고 했던 기억이 나요. 뜨거운 복날이면 엄마는 삼계탕 한 술은 가족들 모두 뜰 수 있게 빨간 들통에 가득 닭 육수에 폭폭 끓여서 준비하시던 그 분주한 뒷모습은 아직도 마음이 따뜻해 지곤해요. 


삼계탕을 저녁을 먹기 전, 육수를 한가득 머금은 찹쌀을 베주머니에서 엄마 몰래 한 스푼 퍼먹으면 찹쌀에 녹진하게 녹아든 육수와 그 쫀득함이 어찌나 그리도 맛있던지요- 아 생각만 해도 입에서 침이 벌써 고이네요. 몹시 더운 복날, 몇 시간 줄을 서서 먹는 그 뜨끈뜨끈한 삼계탕 맛집의 깊은 맛은 아니어도, 집에서 해 먹는 삼계탕의 맛을 고랑이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조리 시간이 끝났다는 쿠*의 활기찬 목소리와 노랫소리에 신기해하며 고랑이는 벌써 기대가 아주 크네요. 고랑이가 밥솥에서 나오는 소리를 흉내 내며 밥상을 준비합니다. 압력솥에서 푹 고아진 익숙하고도 진한 닭 육수 냄새에 벌써 삼계탕의 기운이 몸에 차오르는 기분이에요. 밥주머니를 건져서 살짝 그 속을 열어보는데, 윤기와 찰기가 자르르한 밥이 아주 잘 익은 것 같아요. 소금과 후추를 꺼내고, 파를 송송 썰어서 본격적으로 삼계탕을 먹을 준비를 합니다. 고새 못 참고, 고랑이는 삼계탕 국물을 한 입 떠서 먹더니 '와'라고 하며 눈코입이 커집니다.




손으로 뚝 떼어낸 닭 다리 살점을 발라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삼계탕을 먹기 시작합니다. 베주머니에서 밥을 몇 큰 술 떠서 닭 육수에 너무 풀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그릇에 올려주고, 발라낸 살점에 소금 후추를 콕콕 찍어서 맛봅니다. 한입 두입 먹을수록 뜨끈뜨끈한 기운이 몸에 차오르면서 바작바작 땀이 조금씩 납니다. 삼계탕은 음식이면서 보약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음식으로 좋은 기운을 받으면, 아마 더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더 행복하고 기운나는 시간을 만들 힘이 날 거라고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봅니다


겨우 밥솥 하나만 산 날이지만, 그래도 밥솥 하나에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에 감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새 밥솥을 들고 찍은 사진을 삼계탕 꿀팁을 알려준 '장금이 언니'에게도 엄마에게도 자랑해보며 하루를 마무리해봅니다.


힘들거나 축 처지는 날. 기운 나는 좋은 음식 하나쯤 자신에게 처방해줄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겠죠.

고랑이가 엄마 생각나는 음식이라며 소개해준, 프랑스식 삼계탕(?)  풀 오히 (Poule au riz).

https://www.youtube.com/watch?v=yj2KGFyYcNg 

(3분 조금 넘는 초간단 삼계탕 만드는 영상 덧붙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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