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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Jan 22. 2021

한여름의 감자탕

처음 술을 마신 그 날

처음 술을 마신 그 날을 기억이 나시나요? 

저는 수능이 끝나고 몇 주 뒤, 스무 살이 되어 사촌언니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맥주 한 잔 마시는 법 정도는 배워야지.' 라며 맥주 한 잔을 건네 준 기억이 납니다. 아마 작은 맥주잔 하나도 못 비웠던 기억이 아직도 나네요. 그렇게 알음알음 배운 술은 점점 주종도 다양해지고, 기분 좋게 흐트러질 정도로만 즐겁게 마시는 주량도 생김과 동시에 이름하여, 해장음식의 세계에 접하게 됩니다.




오징어살을 송송 썰어서 얼큰하게 수란과 먹는 콩나물국부터, 소울푸드처럼 찾아대는 돼지국밥, 직장 앞 근처에 향수를 자극하는 부대찌개, 출근하면서 입에 물고 들어오는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해산물과 고추기름이 듬뿍 들어가 속이 확 풀리는 짬뽕, 가끔 직장상사들 틈에 끼어 운좋게 한 그릇 했던 복지리, 그리고 집에서 편하디 편한 복장으로 뜨끈하게 끓여먹어 땀을 쫙 빼는 해장 라면의 끝에는 저의 첫 해장음식이었던 '감자탕'을 빼놓을 수 없어요.



꽤 오래전 추운 겨울날, 저는 봉사활동을 마치고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출발지점으로 돌아왔고 그곳에 모인 이들 다들 서로 수고했다며 술 한잔을 하자고 했거든요. 대학교를 들어온 뒤, 동기들이나 선배들과 술 한잔 할 시간도 없이 제 생활에 바빴던 저는 그래도 이런 날에는 못 빠지겠다 싶어서 맘먹고 머물렀는데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맨날 바쁘다고 해서, 나는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라는 말에 미안함도 느끼며, '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라는 말에 또 안도감과 뭉클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20대의 혈기 넘치는 대학생들은 막차가 끊기고, 노래방에서 잠도 좀 깼다가, 첫차가 운행될 때까지 기다리는데 선배 하나가 날이 무척 추우니 빈속으로 가지 말라며 근처 단골집인 '감자탕'집으로 저희를 데리고 갑니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는 공기가 무척 날카로워서 걸어서 감자탕집까지 가는 그 5분 거리 정도의 길도 참 싫었는데, 후끈한 가게의 온기에 감자탕 한 숟갈과 돼지고기 살점을 잘 얹어서 배부른 채 다시 만난 밖 공기는 '이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이 들며 상쾌하고 머리가 시원해진 채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첫 감자탕을 먹고 종종 그 야들야들한 살과 진한 국물이 생각날 때, 가끔 술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 소주 한잔 걸치곤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남쪽나라의 한여름 날인 오늘은 집에서 저희 집 남자 고랑이의 기대에 가득 찬 동그란 두 눈 앞에서 감자탕을 끓여보기로 합니다. 


지난번에 구운 크리스마스 햄입니다.


지난번에 구운 커다란 크리스마스 햄을 어떻게 먹을까 하다가 살점은 용도에 맞게 썰어서 소분을 하고, 다리뼈와 껍질 부분은 육수용으로 쓸만한 야채, 고기를 다듬고 남았던 부위 등을 함께 여러 번 고아서 오랜 시간을 끓여 육수를 만들었어요. 육수는 나누어 다시 냉장을 해 두었다가 위에 둥둥 뜬 기름 부분을 걷어내고, 소분해서 냉동고와 냉장고에 용도별로 라벨을 붙여서 넣어둡니다. 


주방에서도 가장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육수나 jus라고 해서 고기와 곁들여먹는 소스 같은 그레이비를 만드는 작업인데 ,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된장 라멘 육수부터, 국 찌개용, 그리고 고랑이가 가장 기대했던 감자탕용 육수도 넉넉히 만들다 보니 사우나가 따로 없더라고요. 그래도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만들어서 인지 육수가 젤리같이 탱글탱글하고 뽀얀 색이 제법 나서 땀 흘린 보람이 있구나 싶어요. 


감자탕

며칠 뒤, 들기름에 파와 고추장, 고춧가루를 볶아서 기름을 내고, 잘 준비되어 밑간이 된 고기와 뭉툭하게 깎은 감자를 볶으며 만들어 놓은 육수를 몇 차례 나누어 부어 지난번 김치를 하고 데쳐놓은 우거지를 된장에 무쳐두었다가 함께 뭉근하게 끓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파도 송송 썰어주고, 깻잎도 돌돌 말아서 썰어주고, 들깻가루도 작은 그릇에 담아줍니다. 잘 불려진 쌀은 저희 집 요리 도우미 쿠*가 그새 맛있게 밥을 했다며 노래를 부릅니다.


한여름에 땀흘리며 만든 감자탕 완성입니다.


국물 간을 볼 겸, 냄비 뚜껑을 잠시 열었는데 보글보글 끓는 감자탕 냄새에 미소를 지어봅니다. 한국에서 처럼 돼지등뼈를 구해서 넓은 들통에 뽀얗게 우려내듯 끓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대로 감자탕 한 번을 끓여서 먹어보겠다며 애를 쓴 보람이 있구나 싶어요. 아껴서 잘 생활해보겠다는 마음에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난생처음 보는 재료로 흉내를 내어 만든 첫 감자탕에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어 봅니다. 


배달음식 하나 없는 곳에서 삼시세끼 하나부터 열까지 차려 먹는 게 생각보다 참 일이지만 그래도 함께 이 음식을 나눌 이가 있다는 게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육수를 살작떠서 간을 보던 고랑이는 작년에 호주에서 맛본 최고의 음식점이라며 손꼽은 해장국집 육수 맛이 난다며 그 커다란 눈이 더 동그래지면서 신나는 표정으로 냉장고에 있던 소주와 찬장에 있던 소주잔을 꺼내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프랑스 남자는 냉장고에 소주를 오늘 아침부터 넣어두었다고 하네요.



해장음식이 아닌 한국음식은 도대체 뭐야?


감자탕에 들깨가루를 더 추가하더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감자탕 좋아요'을 외치는 고랑이에게 '감자탕은 좋은 해장음식이야.'라고 하며 소주 한잔을 더 따라 주었는데 고랑이는 저에게 되묻습니다. '해장음식이 아닌 한국음식은 도대체 뭐야?'라고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저는 그냥 조용히 따뜻한 밥 한술을 감자와 함께 국물에 으깨 한입을 머금어 봅니다. 


늘 맛있는 음식에는 가끔 혼자 슬며시 웃는 순간이 있는데 이렇게 함께 밥을 먹는 누군가의 표정, 밥그릇에 부딪치는 수저 소리, 가끔은 엉뚱한 말들이 하나씩 더해지며 마치 맴도는 한 가락의 노래처럼 머릿속에서 반복됩니다. 함께 살며, 함께 먹는 음식들의 숫자가 늘어간다는 것은 이런 순간이 늘어간다는 것이겠죠.





감자탕을 두 그릇 가득 채워서 둘 다 맛있게 먹고는, 어제 장을 보고 사온 리치를 손으로 까서 후식으로 먹어봅니다. 손에 동글동글 까끌까끌 닿는 리치 껍질의 촉감도, 손에 묻은 끈적함도, 분홍빛 다홍빛이 쌓여가는 리치의 껍질 그릇도, 시원하고 달콤하게 입안을 상쾌하게 해주는 리치의 톡 터지는 과육도, 한여름에 맛본 감자탕과 함께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고랑이가 은퇴 후, '한국 전원생활하며 감자탕과 돼지국밥 맛집투어를 다니는 게 꿈'이 라고 해서 저를 웃게 한 것도 이 한여름의 감자탕의 가장 큰 추억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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