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을 꼽자면, 아마 다들 가족들이 모여서 보내는 각 나라의 명절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이곳에서 첫해 크리스마스에는 혼자 근처 마트에 가서 크리스마스 푸딩과 와인을 사온 뒤, 조금씩 잘라먹으며 이틀 내내 방 안에서 여러 가지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나름 사진도 예쁘게 찍어서 인****에도 올렸지만, 다들 오순도순 모여서 보내는 시간에 혼자 밥 한 끼를 같이 먹을 사람도 없이 며칠 텅 빈 집에 혼자 있는데 그저 자취할 때와는 또 달리, 처음으로 '외롭다'는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몇 번의 크리스마스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한해 한해 감사하게도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더해준 새 추억을 한 겹 더 덧칠해 봅니다.
크리스마스 햄
호주에는 크리스마스는 '가족'을 위한 명절이기 때문에, 보통 가족들이 모여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는 거대한 '칠면조'나 커다란 '햄'을 구워서 함께 나누어 먹곤 합니다. '크리스마스 햄'을 마트 카탈로그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본 저는 12월 초부터 작은 냉장고 하나를 채울 커다란 햄을 사다 두고 지난 크리스마스를 사실 무척 기다렸어요. 하지만, 코로나 덕에 다른 도시에서 오기로 한 손님들과의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가 취소되고 그렇게 몇 주동안 방치된 햄이 곧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터라 어제서야 휴무인 고랑이와 함께 햄을 구워 먹기로 합니다.
햄 포장지를 뜯고, 햄 겉면의 껍질과 비계 부분을 어느 정도 정리해 주고 칼집을 내어 머스터드, 후추를 바른 뒤, 1시간 30분 정도 햄을 너무 높지 않은 온도에서 속까지 잘 데워줍니다. 잘 구워진 햄에 향을 입혀줌과 동시에 겉면을 노릇노릇 구워주기 위해서, 메이플 시럽과 오렌지 마멀레이드 잼, 버터를 고루 발라 준 뒤 구우면서 매 15분마다 바닥에 녹은 소스를 다시 입혀주는 작업을 하며 40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구워줍니다. 남은 소스는 약한 불에 잘 졸여서 햄을 곁들일 소스로 만들고, 햄은 실온에서 20-30분 정도 식힌 햄에 정향 등을 꽂아서 장식해주면 완성이 되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크리스마스 햄.
가정마다 요리법이 다르지만, 고랑이가 영국과 프랑스에 있었을 때 하던 레시피와 제가 아이디어를 보태 조금 변형된 저희 두 사람의 레시피로 준비해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리오틴 체리도 꺼내어 향이 강한 정향 대신 저희는 이쑤시개에 체리를 하나씩 콕콕 박아서 햄에 꽂아줍니다. 고슴도치 같다고 키득대면서도 서로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칭찬을 해줍니다. 아마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두 사람만의 요리법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겠죠.
저 큰햄을 언제 다 먹지...
고랑이와 저는 호주에 와서 사귀었던 친구들, 이곳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시간들을 이야기하며 꿀 향이 잘 올라오는 와인을 곁들여 햄을 먹어봅니다. 고랑이와 저는 '저 큰 햄을 언제 다 먹지...' 서로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먹으면서도, 저에겐 아마 이번 크리스마스 햄은 제가 맛보는 호주에서의 첫 햄이자, 저희 둘의 크리스마스 레시피를 쓴 첫 해이니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겨우 둘이서 햄의 작은 부분을 먹었지만, 손님들과 함께 먹는 식사보다 더 여유 있게 즐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고랑이와 크리스마스 때 함께 본 '클릭'(아담 샌들러가 나오는 영화죠)과 비슷한 결을 가진 '어바웃 타임'을 저의 추천으로 후식으로 잘 익은 멜론을 먹으며 보기로 합니다. 올 한 해,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고. 365일, 매일매일이 축제일 수는 없지만 생의 하루하루가 축복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오늘 하루를 또 이렇게 기억해 보기로 합니다.
“우리 모두는 시간을 따라 생의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이 멋진 여정을 즐기는 것뿐-" (영화 '어바웃 타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