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3시 40분까지 가겠습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 1

by 우즈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채팅을 건다. 당근이다. 거래할 물건은 아이가 읽겠다는 책이었다. 아이가 원하는 책이라면 47권짜리 전집도 속전속결이다. 내 손목과 어깨에 무리가 오더라도 얼씨구나 흥이 넘쳐 엘리베이터로 옮기는 나는 열혈 K-엄마 아니던가.

어디서 거래 가능한가요?
** 농협 뒤 세븐일레븐 건물입니다.


‘** 농협’ 쪽으로 안 가봤지만, 세븐일레븐이 친숙하고 오픈된 장소라 안심됐다. 보통은 아파트로 중고책을 받으러 다녔는데 이번은 편의점 앞이라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거래 후 소소하게 음료수 하나 사 먹을 생각도 들어 흥미롭다. 시간은 판매자가 먼저 제시했다. 다음날 오후 4시였다. 4시가 좀 거슬렸다. 아이 치과 검진이 3시에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확답을 잠시 미루고 핸드폰으로 동선과 소요시간을 체크했다.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할 바엔 거래 시간을 바꾸는 게 낫다. 검색하니 치과에서 거래장소까지 차로 4분이다. 단숨에 가겠다. 진료도 빨리 끝날 거다. 3개월마다 하는 검진이므로.


"3시에 치과 갔다가 4시에 우리 책 받아오자." 어쩌면 중간에 시간이 애매하게 남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 차 안에서 리코더 연습이나 하면 좋겠다고 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4시가 좋다고 확답을 보낸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알림이 다시 울렸다. ‘당근!’ 개인 사정으로 약속 시간을 4시 말고 3시 40분으로 시간을 당기면 좋겠다는 판매자의 메시지다. 그렇게 20분 시간이 당겨지게 되면, 내 일정이 좀 빠듯해진다. 치과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가 관건이다. 이때까지 내가 가는 치과에서 예약 시간을 5분 이상 미룬 적이 없었다. 수차례 누적된 신뢰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이 시간 약속에 성공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마 별 일 없이, 30분 안에 진료를 다 볼 것이다. 답장해야겠다. 여유 있다는 듯 교양 있게.

네. 3시 40분까지 가겠습니다.


치과에 도착해 대기실 의자에 앉을 때가 2시 50분이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가는 오래된 내 습관이 있다. 미리 가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고질병이다. 예약시간보다 먼저 와 여유롭게 기다리는 이 순간, 나는 아이 치과 검진을 꼬박꼬박 챙기는 책임감 있고 교양 넘치는 엄마 같아 내 모습이 흡족하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너그러운 미소로 아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곧이어 수납창구에서 대화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 진료를 위해 할머니, 딸이 같이 온 모양이다. 틀니가 문제였다.

임플란트보다는 틀니가 낫습니다.
틀니가 그거 뭐 괜찮은 거라요?


임플란트를 하려고 계획했는데 신경을 잘못 건드릴 자리라 위험해서 선생님이 틀니를 제안했나 보다. 할아버지 부부는 틀니가 꺼려지고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할아버지에게 임플란트보다 틀니가 왜 적절한지, 틀니를 착용하는 생활에 대한 간단한 설명, 다음 진료는 어떤 걸 하게 되는지 등 선생님의 설명이 아주 상세하다. 안 들을래도 다 들린다. 쉽지 않은 상담에 시간이 많이 든다.


3시 10분이다.

우아하게 책을 읽던 나는 책을 놓았다. 적절한 리듬으로 다음 진료 대기자를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좀 됐다. 분업이 칼같이 맞아떨어지다가 한쪽이 멈춰버려 나머지가 올 스톱된 치과 공장은 분위기가 싸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을 한다. 분위기상 설명은 더 필요하다. 그래, 이 치과는 의사 선생님의 친절함이 시그니처니까 좋다 십분 더 설명한다치고. 그러면 3시 20분에 우리 아이가 진료를 받는데, 진료는 빨리 본다는 가정하에 3시 30분까지. 수납하고 다음 검진 일정을 잡으면 32분. 차까지 걸어가는데 35분. 약속 장소까지 40분 도착이 빠듯하다. 아, 이거 뭔가 수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찌할 줄을 모르고 진료실만 애타게 바라봤다. 할아버지가 어서 ‘선생님이 알아서 잘해 주이소.’ 하고 나오셨으면 좋겠다.


3시 15분을 넘어가고 3시 20분까지 되었다.

시계와 진료실을 번갈아 보는데, 똥줄이 타들어간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마음의 물갈퀴가 쉴 새 없이 파닥거려 심장이 요동쳤다. 지금 내게 이런 시련을 준 치과가 야속하다. ‘빨리 설명을 끝내시라고요. 제가 3시에 예약하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 가족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3시 25분을 지나고 있다. 확실히 늦는다. 시간 정정이 필요했다. 늦는다고 채팅창으로 알려야 한다. 당근 판매자에게. 그렇지만 이 사람과 첫 거래인데 ‘시간 약속을 안 지켜요’ 같은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기가 싫다. 어떻게든 처음 약속 시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약속 시간을 번복하는 건 구차하고 책임감이 없어 보인단 말이다.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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