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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즈 Jul 20. 2023

백 개의 제목이 작가의 서랍에 있습니다만

제목과 소제목일 뿐

거룩한 일과가 있다.

눈을 뜨자마자 브런치 창을 열고 작가의 서랍을 뒤져, 내일 발행할 글감을 찾아내는 일이다. 오래전에 써 둔 것이라 목만 봐서는 구체적인 상황이 바로 안 떠오를 때도 있는데, 그것도 쓰겠다고 그 순간에 기록한 나 자신이 기특해 지우지 못한다.  어떤 말로빨리 문장을 채워 한 편의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동시에, 아무렇게나 쓰고 싶지는 않다는 작은 내 양심이 공존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않은 비밀 같은 글쓰기다. 그래도 마감 기한이 정해진 기자처럼 성실한 열정을 쏟아낸다.  


글감 사냥꾼이 되었다.

하루를 지내면서 서너 시간에 한 번씩, 뭐 했더라, 하면서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글감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그럼 제목으로 얼른 적어둔다. '도서대여용 북카트', '튜브', '무음 설정' 이런 식으로 작가의 서랍에 써둔다.


10개월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브런치 입성 초반에는 작가의 서랍에 두세 개의 글을 쓰기도 벅찼다.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저 먼 과거로의 여행을 몇 번 떠났는지 모른다. 결국 길을 잃고 오기를 여러 번. 제목 하나 쓰기가 두렵고 부담스러웠다. 글쓰기를 몇 달째하고 있으니 정말 '쓰는 뇌'로 바뀌었나 보다. 이제 일상에서 소재가 될 법한 것을 제목의 형태로 남기는 일은 만만하다. 제목과 소제목으로 남겨두는 일. 그건 너무 쉬운 일이라, 며칠 만에 가볍게 100개가 거뜬히 넘어갈 지경이다. 처음 몇 십 개가 될 때는 스크롤을 적당히 하면 찾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글을 하나 찾으려면 저 밑까지 내려가기 위한 스크롤을 열세 번도 더 해야 해서 불편해졌다.


메모만 하는 것도 병이다.

내가 여기저기 쓴 메모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했지만 뾰족한 답이 없었다. 핸드폰의 컬러메모 앱, 노트북의 스티키 메모 앱, 다이어리 수첩, 노트, 포스트잇, 거기에 브런치 '작가의 서랍'까지. 많은 메모를 볼 때마다, 누가 폴더별로 카테고리를 나누어서 보기 좋게 싹 정리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다. 어느 한 곳에 정리되어 있어서, 단어로 '다정함'이라고 검색하면, 한 번에 내가 쓴 아이디어를 쭉 볼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 이제 내 메모를 스캔해서 올리기만 하면, 인공지능이 그런 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찾아주는 기능이 생기겠거니 하면서, 무섭다. 내 생각을 구석구석 다 알고 있는 신 앞에서 나는 어떤 재주를 부려야 하는 것인지.


기록학자에게 배웠다.

김익한 교수의 '거인의 노트'라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그의 영상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그는 일단 쓴 메모를 박스 안에 모아둔 뒤, 한 달에 한 번은 날을 잡고 그 메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했다. 그렇게 정리한 A4용지를 읽고, 다음 달은 반복해 읽다가 간추리고, 새로운 내용을 업데이트한다는 식으로 메모를 정리한다고 했다. 결국 정리였다. 읽은 책도 정리하며 읽지 않으면 깊이 생각할 수 없고, 내 아이디어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휘발된다.


작정하고 덤볐다.

작가의 서랍에 쌓여 있는 180개의 목록 정리다.

제목만 써 둔 글이 백여 개, 한 단락 정도로 짧게 서둔 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 단락이상 써둔 글은 손에 꼽는다. 어떤 제목의 글이 어느 정도 썼는 지를 몰라 매번 클릭하게 되고, 리스트가 쭉 나열되어 있기만 해서 저 밑에 있는 글을 다시 보려면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한다. 불편하고 정리가 필요했다. 제목을 정리해 카테고리 별로 묶고 몇 단락을 써두었는지 체크했다. 그러다 아예 손대는 김에 40여 편의 글을 긁어서 한글파일에 저장해 보기 좋게 편집하고 인쇄해서  바인더에 정리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바인더를 펼쳐서 한 문장에 집중하여 수정해나가 볼 계획이다. 소재가 떠올랐을 때 관련되는 일을 주절주절 두서없이 막 쏟아내는 일과 그 문장들을 다시 자연스럽게 구성에 맞게 배열하는 일에는 머리를 쓰는 방향과 속도와 에너지가 다. 자, 이제 제일 맛있는 녀석으로 하나 골라서, 한 문장씩 한 단락씩 더 양념을 끼얹고, 그 녀석과 어울릴 만한 색깔의 토핑을 골라, 감각적인 플레이팅을 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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