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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즈 Aug 13. 2023

글의 온도

순간의 힘

익숙한 공간에서 쓰는 글과 움직여 낯선 곳에서 쓰는 글에는 미묘한 글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에서 책상에 만히 앉아서 쓴 글과 비교해 보면, 이동할  유난히 양한 영감이 불쑥불쑥 찾아올 때가 많았다. 특히 운전대를 잡은 차 안에서 감정적인 소재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동하는 순간의 힘이라고 나름 정의를 내렸었다. 그래서 나서는 가방에도 항상 메모지와 챙겨 다니는 습관이 있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이런 식의 글을 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우연이 때로는 전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를 들어 아주 오랜만에 연락온 지인의 전화 한 통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온종일 뭘 하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찰 때가 있다. 그간 연락을 통 못했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나도 참 신경을 못 썼어. 생각과 감정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우연과 변수와 아이러니의 집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뜻밖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내 인생을 살펴나가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이 잘 안 될 때가 다. 화가 오랜만에 왔을 수도 있는데, 너무 거기에 매달려 '우리의 관계가 그동안 왜 그렇게 서먹했을까'라는 식의 생각에 사로잡혀 골몰하며, 일상을 그르친다. 그럴 때의 공통적인 원인을 가만히 따져보면, 당위적 사고에 갇혀 유연성이 부족할 때이다. '나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도 좋은 관계로 계속해서 잘 지냈어야 했어.라는 인간관계에 대한 당위적 사고가 한 몫한 것일 것이다. 당위적 사고에 사로잡히면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겼을 때 적절하게 대처하기 어렵다. 플랜 B로 대응하려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예상 못한 결과에 대해 원인을 제공했을 법한 누군가를 찾아서  원망하거나 스스로에게 책임을 가져와 나를 벌주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을 자주 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왜 내게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계절이 변할 때마다 연락할 수 있었음에도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을까. 하면서 끊임없이 과거를 돌이켜보느라 심적 에너지가 바닥난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남에게도 어필하면서 인간관계의 골을 깊게 하기도 한다.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쓰지 못하고 낭비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안 좋은 예이다.


사소한 우연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뜻밖의 변수에 뜻밖의 알아차림을 하며, 아이러니 속에서 인생사 새옹지마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평정심을 갖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밖으로 나가 운전대를 잡는 순간 발상이 전환된다.

약 2주 동안, 친정 집에 있다가 떠나는 날이다. 차에 올라탄 우리 가족을 보면서, 친정 엄마가 말했다. '나도 그냥 같이 따라 올라타서 가고 싶다.'

그 말이 아렸다. 헤어지기 싫다. 아쉽다. 좀 더 같이 있고 싶다. 아직도 못 한 것이 많다. 그동안 너무 좋았다. 일상으로의 복귀는 지금보다 삭막하다. 그런 마음들이 떠올랐다. 편안한 시간만을 보낼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이제는 책임감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어른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여기까지 좋았어. 또 일상의 무거움을 유쾌하게 견디고 돌아와, 다시 또 만나요.



비가 오면 뛰쳐나간다고 하는 글을 봤다.

평소 구독하던 브런치 작가님의 글이었다. 차 안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그 순간이 좋다고 말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아차! 하며 그래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나 싶었다. 아이를 라이딩하면서 잠시 기다리는 그 십 분 동안 글을 쓰거나, 수정하면서, 글에 어울리는 사진을 고르면서 순식간에 시간이 삭제되는 경험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었다. 그 시간을 더 늘려볼 생각을 왜 못해봤을까. 작정하고 삼십 분 일찍 나서서 그 시간을 만끽하는 거다. 이왕이면 작은 먹을거리도 함께 말이다. 커피나 방울토마토와 같은 것을 챙겨 나가는 거다. 그러면 간단한 음식과 읽을 책과 핸드폰이 있는 나만의 공간이 쉽게 완성된다.


 속에서 쓰는 글과 집에서 쓰는 글에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다. 며칠 전에 쓴 글과 몇 달 전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받게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과 유사하다. 둘 다 소중하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기에 여러가지 버전의 나를 발견하는 재미랄까. 써둔 글이 차곡차곡 모인 곳간에서 누리는 나만의 기쁜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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