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녀 Sh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즈 Nov 25. 2022

집착의 뿌리

아줌마가 문방구에 자주 가는 이유

애보다 내가 더 신났다.

휴가라 친정에 간다. 교보 핫트랙스다. 혼자 갈 때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놀이공원만큼 설렌다. 그런데 이번엔 아이와 함께다. 언제 가냐고 재촉한다.

위기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애 취향은 정확히 알아둬야 한다. 딴 애 말고 우리 애 취향은 내가 최고 전문가니까. 단박에 파악한다. 아기자기한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 코너다.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너에게, 너도 좀 머무를 신세계를 선물한다. 됐다. 시간을 벌었다.      


“그럼 너도 2개, 엄마도 2개다.”

오늘만 인심 쓰는 척. 엄마 다 고를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는 단서도 붙인다. 안 그럼 네 것도 못 산다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시간을 번 하이에나는 사자에게 쫓기는 듯한 마음으로 코너를 훑는다. 담다 보면 끝이 없다. 이걸 인터넷으로 사도 된다는 걸 알지만 나는 지금 해치워야 한다.    

  

늙은 엄마는 차에서 기다렸다.

40이 다 된 딸이 문방구에 간 동안. 신데렐라처럼 허겁지겁 차에 올라탄다. 매번 올 때마다 야무지게 문구를 쓸어 담는 딸자식의 이야기를 엄마는 지인에게 걱정스레 말했다 한다. ‘야가 트라우마가 있는가 보다.’

근데 엄마 때문이잖아. 트라우마 생긴 거.      


어릴 적, 연습장이 있었다.

책꽂이 한편에 비닐도 뜯지 않은 채 금쪽같이 모셔뒀다. 어느 날 그것이 책상 위에 난데없이 무참히 펼쳐진다.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어느 한쪽에 줄 간격을 무시한 채로 비딱하고 급하게 써 내려간 전화번호 흔적. 범인은 1초 만에 알았다. 엄마다.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다급하게 휘갈겼으리라.      


이건, 역대급 사건이 된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원망의 에피소드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친다. 내가 이렇게 큰 소리를 집에서 낸 적이 있던가. 몸을 떨면서, 울며불며 화를 내는 내게 엄마는 어이가 없어서 도리어 화를 낸다.

“그게 뭐라고 그라노. 아끼다 뭐 할라고?”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던 아이.

“얘는 뭐 사달라 떼쓰고 그런 적이 없어요.”

그 아이가 피아노 다음으로 다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인생에 나타난 거다. 하얀 하드커버 바탕에 적당한 무늬와 아기자기한 취향 저격 그림이 들어있는 스프링 연습장. 딱 내 취향이었고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뭔가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예고도 없이 침략당했다.

엄마는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이건 소중한 내 보물이라고 말해도 모른다. 유년 시절, 뭘 바라도 얻을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일찍 철든 딸내미가, 혼자 고이 지키고 싶었던 내 소중한 자존감이라는 걸. 그것이 눈앞에서 처참히 짓밟혔다. ‘아끼다 똥 된다’는 식의 말과 함께, 오히려 화를 내는 엄마 앞에서.     


가슴속 원망은 꽤 뿌리가 깊었다.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눈물을 삼키며 낙서가 적힌 종이를 곱게 떼어냈다. 안타까움과 억울한 분노가 뒤섞인다.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연습장을 내려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막 써 볼까 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활을 지나 결혼해서 딸아이를 낳을 때까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내 분신 같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노트를 사고 쟁여놓고 없어질까 불안하니까 더 사고 두 개씩 사는 것이. 40대인 지금도 문방구에 가면 정신을 못 차린다. 연습장은 내 집착의 뿌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하러 산으로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