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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식 Aug 03. 2021

학생, 적은가?

아뇨 테란입니다

“야! 빨리 세시! 세시! 세시로 들어가!”


현수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에 맞춰 내 동료를 그곳으로 이동시킨다. 힘찬 손가락질 한번에 그들은 달려간다. 그리고는 이내 비명을 내며 죽어 나간다. 주위는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전쟁이다. 이미 이 곳은 붉은 피만이 흥건한 전쟁터다. 전투에 패한 나와 전우들은 결과를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좋은 승부였다. 눈을 감고 전우들과 함께한 전투를 떠올린다. 그때 지원병력이 좀 더 일찍 왔더라면. 무리하게 적의 본진으로 침투하지 않았더라면. 후회가 밀려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직전이다. 눈물 한방울을 짜내려는 찰나에 현수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 이종혁 스타 존나 못하네 진짜”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다. 대한민국 전역에 피씨방이라는 신종 놀이방의 유행을 이끈 게임. 한국인이라는 종족이 세계에서 게임을 가장 잘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준 스포츠 종목. 내 10대의 절반을 함께 해왔던 전략과 음모의 승부. 하지만 이제는 RAM 너머 저 어딘가로 숨어버린 응용 프로그램. 스타크래프트를 기억한다. 나와 함께 싸운 히드라와 뮤탈을 기억한다. 내 그리운 전우들을 기억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이따금씩 그립다. 그때 당시 유행이기도 했고 워낙 재밌기도 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세 종족이 피를 튀기며 싸운다는 기본 스토리가 가끔씩 생각난다. 그게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종족간 밸런스는 맞춘다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늘 있기 마련이다. 테사기(테란사기) 게임. 그게 스타크래프트가 대중들에게 외면 당한 이유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 사기 종족을 이기는 반전의 재미가 있었다. 게임안에서도 나는 최약체였다.


내 주 종목은 저그였다. 지구로 치면 바퀴벌레나 사마귀와 같은 부류인 우주 곤충족. 최첨단의 과학으로 무장한 외계종족 프로토스보다 미개했고 모든게 사기급으로 뛰어난 인간 종족 테란보단 흉물스럽고 약했다. 하지만 난 그들의 가벼움이 좋았다. hp가 상대적으로 낮아 쉽게 죽을지언정 한대라도 더 때릴 수 있는 빠른 공격속도가 좋았다. 나는 저그가 좋았다. 나는 저그가 되고싶었다.


나는 저그의 쉽게 지지 않으려는 속성이 좋았다. 타고난 능력치는 테란이나 프로토스보다 떨어져도 절대 쉽게 죽지않고 상대방에 상처라도 입히겠다는 정신. 게임 안에 담긴 단순한 알고리즘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일이다. 하지만 요즘따라 그게 더 절실하게 그립다. 스타크래프트 안에선 그래도 저그가 테란을 10번 중에 2번은 이길 수 있었다.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개 사기적인 테란으로부터 gg를 받아 내는 일이야 말로 어린시절 느낄 수 있는 큰 희열이자 감동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일은 없다. 현실에선 게임처럼 반전이 없다. 저그가 테란을 이기는 일은 없다.


출신성분이 뛰어나지도 많이 가진 부모 밑에서 자라지도 않은 예산의 한 아이는 저그다. 강남 8학군 속 교육 철학 아래 부족함 없이 자란 강남 키드는 테란이다. 강남 키드가 서울 곳곳에 심어놓은 마인을 밟는 예산의 아이는 늘 다친다. 저 높이 심은 아파트는 가슴을 찌르고 땅에 붙을 정도로 낮게 심은 스포츠카는 다리에 멍을 생기게 한다. 저그는 약할지언정 쉽게 지지 않을 빠른 공격 속도를 가졌지만 현실에선 그마저도 쉽지 않다. 현실의 테란은 뽑힐 때 부터 공격속도 업그레이드가 되어있으니까. 저그의 속성이 현실에선 통하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스타크래프트가 그립다. 저그가 테란을 2번은 이기던 반전이 그립다. 사법고시가, 학력고사가 그리워 진다. 개천에서 난 뮤탈이 마린을 잡는 희열이 그리워졌다. 그렇다고 손 놓고만 있는 것이 저그의 특성은 아니지만 더 바쁘고 더 빠르게 발버둥 칠수록 스팀팩이라는 약발을 세우는 테란 앞에 내 뮤탈은 무기력해진다. 나와 함께 싸우던 히드라와 뮤탈아 안녕. 휴지통 속에 숨어버린 너희를 다시 복원시키고 싶다. 이제라도 너희를 가디언과 럴커로 진화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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