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서 1,428끼 - 삼미칼국수
가을비가 쏟아진다. 아, 출근해야 하는데. 11월에 내리는 비는 늘 냉정하고 차갑다. 꼭 날이 추운 11월에 내려서가 아니라 평일 아침 부터 내리기 때문이다. 출근을 위해 집 밖을 나서는 기분이 영 안좋다. 평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렇다. 가뜩이나 힘든 출근길을 차가운 비와 싸우며 가야하다니. 팀장님께 아프다고 연차를 쓴다고 할까, 아니다 그냥 회사 그만 둔다고 할까, 인수인계도 해야하고 잔여 연차도 소진해야해서 어쨌든 며칠은 출근해야 하긴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아프다는 핑계가 제일 낫겠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머리 밖으로 늘어놓다 이내 다시 집어 넣는다. 나는 출근을 미룰 수 없다. 현대카드 정태영 대표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나가라 일터로, 너에겐 갚아야 할 카드 값이 있다.
끝내 올리지 못한 연차 휴가를 세며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했다. 꼴을 보니 지나가던 생쥐도 비웃을 지경이다. 난 비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패배했다. 물론 내 꼴을 비웃을 지나가는 생쥐는 회사에 없다. 하지만 회사엔 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안겨 줄 내 차도 없다. 비가 올때면 늘 차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차로 출근한 팀장님의 모습은 나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팀장님의 두 발은 방금 샤워라도 하고 나온 듯 뽀송하기만 하다. 젖은 신발을 닦고 양말을 말리고 있는 나와 사뭇 다른 여유 있는 모습이 새삼 낯설다. 저것이 팀장의 삶이란 말인가. 어디에서 튀었는지 알 길이 없는 흙탕물을 닦아내다 문득 생각한다. 빨리 점심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점심 메뉴는 팀장님도 나도 모두 똑같으니까.
제 아무리 세상이 나를 못살게 굴어도 좋은 일 하나쯤은 늘 있다. 나에겐 아직 점심 메뉴라는 모든 직장인의 꿈과 희망이 남아 있다. 보통 점심 메뉴는 그 날의 온도나 날씨, 팀장님의 지난 밤 저녁 메뉴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왔기 때문에 그 결정이 날씨에 의해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높다. 비 오는 날에는 꼭 먹어야 하는 메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메뉴는 우리 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 구직자, 대학생, 프리랜서 모두 동일하다. 이런 날은 온 국민이 탄수화물을 원한다. 특히 밀로 만든 것.
비 오는 날의 유일한 장점은 밀가루 음식을 먹어도 죄책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날은 다이어트든 밀가루 알러지든 관계없이 모두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어도 된다. 오히려 먹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다. 비가 오는데 파전을 먹지 않는다고? 한국인의 사전에 그런 예문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점심 대낮부터 파전에 막걸리를 걸치고 발개진 얼굴로 오후 업무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파전은 칼국수라는 좋은 친구를 두었다. 차가운 날씨에 적절한 온도의 국물과 진득한 밀가루면 위로 알록달록한 고명까지 입은 최고의 음식. 칼국수만이 아침부터 지친 나를 위로할 수 있다. 그리고 판교엔 그 위로를 한 그릇에 가장 잘 담아내는 식당이 있다. 오늘은 '삼미 칼국수'에 가야 한다.
시계 시침이 12시를 가리키자마자 단톡방에 좌표를 찍는다. 판교로 출근 한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판교로 출근 한다는 것, 단돈 8천원에 밥, 면이 무한 리필 되는 칼국수를 점심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착한 가격 뿐 아니라 삼미 칼국수의 멸치 국물은 감동이라는 표현 외엔 달리 설명이 안된다. 또 가게 벽에 붙어 있는 안내문들은 칼국수 한 그릇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인간애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손님들에게 나누는 사장님의 사랑이다. 어쩌면 나는 이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비바람에 맞서 싸워 출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연차를 쓰지 않은 내가 대견하다. 하마터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위로를 맛보지 못할 뻔 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다시 갈등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오후에 반차라도 써야하나. 삼미 칼국수는 굳게 닫혀 있었다. 순간 너무 서러운 마음이 강해 눈물이 나올뻔 했지만 실제로 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달랠 길이 없다. 오늘은 꼭 이 칼국수를 먹었어야 하는 날이다. 날씨도 기분도 모두 이곳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위로라는 건 받는 쪽보다 보다 주는 쪽의 굳은 결심이 늘 중요한 법이니까. 마음이 편치 않다. 칼국수를 먹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덜컥 불길한 걱정이 들었다. 영영 이 칼국수의 맛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 곳이 문을 닫은 건 그 날만이 아니었다. 정기 휴일이라서가 아니라 칼국수를 정성들여 끓여주시는 주인 할머니의 건강 때문이다. 올해 초 할머니는 주방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셨고 그로 인해 6개월 간 문을 열지 못했다. 그 뒤로 이따금씩 그 집을 찾았다. 매번 굳게 닫힌 식당 앞을 지나며 다시 문 여는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할머니가 무사하시길, 내가 기억하는 그 위로의 맛이 사라지지 않기를. 그 맛이 그리울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었다. 할머니의 안녕을 바라는 것 뿐이다.
내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 일까. 모세에게 일어난 기적이 내게도 일어났다. 삼미 칼국수가 다시 문을 연 것이다. 갈라진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사람들 처럼 칼국수 집 앞은 다시 사람들의 줄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기쁨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다. 다시 문을 연지 3개월도 채 안되어 다시 문이 굳게 닫힌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식당 문에는 어떠한 안내문도 붙어있지 않았다. 인사 없는 헤어짐은 늘 서운하다. 사랑이 클 수록 더 그렇다.
식당과 서운한 이별을 겪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내게 그 상실의 첫 경험은 마지막 학기의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자주 가던 닭 개장집과의 이별 이야기다. 그 식당은 영업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그리 눈에 띄는 식당은 아니었다. 촌스러운 간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작은 골목에 위치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내가 더 부지런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돼지의 코는 못 찾아내는 식당이 없는 법. 주(酒)님을 깊이 영접한 전날의 회식 탓에 속을 달래줄 메뉴를 찾아 헤매던 한 마리의 돼지에게 결국은 발각되고 말았다. 그 집 앞을 지날때 풍겼던 닭 삶는 냄새는 나를 당장 그 식당 안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나는 "사장님 여기 닭개장 특 하나요" 라는 돼지 패시브 스킬로 사장님에게 선방을 날렸다. 그리고 사장님은 국물이 넘치는 닭개장을 내놓으며 웃음을 보였다. 그것은 사장님의 궁극기였다. 나는 그렇게 넉 다운이 되고 말았다.
그 날 이후 일주일에 다섯끼 정도는 그 곳에서 해결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도 모른다고 늦게 발견한 맛집은 어제 저녁 메뉴도 잊게 만든다. 그것이 비록 닭개장이었을 지라도. 지난 학교 생활이 한 순간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 맛을 왜 이제야 알았지? 이 곳을 좀 만 더 빨리 발견했다면 심각하게 대학원 진학을 고민했을 것이다. 경영학과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면 그곳을 꼭 프랜차이즈화 시키겠다는 소리를 하곤 한다. 나도 그 닭개장 집의 2호점을 꼭 강남의 술집 상가 중심에 내리라는 포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식당은 내가 발견한 지 한 학기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사장님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갑작스럽게 그 곳을 떠났다.
그 사실은 나를 매번 힘들게 했다. 친구들은 나를 나무랐다. 거리엔 그 닭개장집 말고도 다양한 음식점이 있고 그까짓 닭 한마리 튀겨 먹는게 더 맛있지 않냐며 나를 위로하며 동시에 질타했다. 하지만 내 뱃살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럽 없기를 코 끝에 풍기는 치킨 냄새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나는 음식으로 위로를 받는 사람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에 나오는 명대사 이지안이 박동운 부장에게 건내는 그 “화이팅” 한 마디와 같다. 박동운 부장은 그 작은 말로 위로를 받는다. 내게 닭개장은 그 화이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식당과의 이별은 내게 그 위로와의 이별을 의미했다.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는 것 만큼이나 슬프다. 사랑과 위로는 늘 같은 선상에 있으니까.
닭개장처럼 삼미칼국수도 내겐 그 화이팅이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위로. 언젠가 삼미 칼국수와도 그 닭개장 집처럼 이별을 해야할 것을 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올 이별에 나는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 하고싶지는 않다. 가만히 그 이별을 당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난 아직 그 칼국수를 보내지 못한다. 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슬프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묵묵히 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사라진 맛들을 위해. 그리고 사라질 맛들을 위해. 나중에 내가 죽어 천국에 가면 그곳에 내가 좋아하던 식당들이 꼭 있기를 바라던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바라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늘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 모든 식당 사장님들이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그곳에서 장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의 모든 맛들을 위해 기도한다. 늘 그곳에서 무사하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