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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인철 Sep 14. 2022

운명에 대하여

데미안을 읽고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래서 어느 한 면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단순함이 부러우면서도 그 좁은 세계관에 답답해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정하려고 하는 노력은 그래서 무모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래도 하나의 원칙을 정하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그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내가 지금껏 알고 있고 있었던 뜻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사주팔자',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기 어려운 것', '외부에서 주어진 환경이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운명이다. 반면, 데미안에서의 '운명'은 '우리 안에 원래 존재했던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가 완전한 본래의 모습이 되어 자연이 자신 안에 심어 놓은 씨앗의 용도에 맞도록 충실히 사는 것"이다. 운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있는 것을 발현하는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외부 세계에서 강요하는 가치와의 투쟁과 파괴를 의미한다. 데미안의 유명한 아포리즘처럼.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이러한 데미안에서의 '운명'에 대한 의미는 지난달에 읽은 에리히 프롬의 책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깨달은 것과도 비슷하다. 세상의 문제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변화를 통해 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자기 해방과 자유를 통해 사회와 인류를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한다. 헤르만 헤세와 에리히 프롬 모두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유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광기를 경험했다. 그 시대를 고민한 사람들의 반동적인 사고의 흐름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주장했던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유인이 되는 것은 그러한 사고의 흐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제 자기 본연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자기 운명을 찾아가라는 그 애매한 주장에 대한 배경을 알게 된 기분이다. 하지만 원래 반동으로 나온 주장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그 사람이 왜 자유인의 심벌이 되었는지 의아할 때가 있었다. 단지 체제에 반대하는 용기 아니었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살다가 거꾸로 자신의 운명을 발견했을까.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선택하지 못한 나의 국가와 부모와 자녀, 나의 건강과 육체를 주어진 운명으로, 그리고 살면서 행하는 나의 모든 선택을 내가 개척하는 운명으로 해서 나의 본래의 모습을 찾고 자유인이 되는 것을 꿈꾸어 본다. 거리낄 것이 없다. 단, 아내는 나에게 주어진, 그리고 내가 선택한 운명이다. 그런 제약 조건 있는 것이 다행이다. 아니면 방황이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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