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4. 계약직 해외학위 소지자
박사과정 진학을 위해 과정을 찾고 해외 대학의 교수들에게 컨택메일을 보내며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쌓여 한달 두달이 되어가자 이대로 기회만 찾다가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경제적 독립이라는 최소 요건도 충족하고 싶었다. 더 이상 부모님께 '돈이 좀 필요해서요..' 할 수 없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가자.'
회사는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선택지였고 또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 공부를 위한 자금마련이 목적이니 언제든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oo대학교 계약직 행정직원 채용 공고'
집 근처 대학교에 계약직 행정원 공고가 마침 눈에 들어왔다. 연봉은 낮지 않은 편이었고, 위치도 가까웠다. 바로 지원을 했고, 서류, 면접 등의 절차를 거쳐 입사하게 되었다.
교과공부를 잘했던 모범생의 자세로 회사 업무 역시 빠르게 배우고 익혔다. 책임감도 높은 편이라 맡겨진 일은 실수 없이 잘 해냈다. 한두 달의 적응기간이 지나자 어렵지 않게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김민영 선생, 나 좀 보지."
몇 달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팀장이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일은 좀 어떤가? 적응기간은 이제 지난 것 같은데, 맞죠?"
"네, 처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김민영 선생은 그런데 해외에서 살다와서 그런가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죠?"
"... 네?"
본인이 나를 좋게 생각한다느니, 자기 말을 들으면 회사 생활이 편할 것이라느니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문제의 본질은 본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볼 때마다 인사를 했는데, 왜 인사를 안 한다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후 팀장은 기회만 있으면 '아~ 김민영 선생 해외살다와서 그런가~' 하며 면박 아닌 면박을 주곤 했다.
공부하듯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될 거야'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첫 회사에서 일 외의 것들의 중요성과 크기가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팀장의 눈밖에 나지 않기, 팀 내 존재하는 미묘한 힘의 역학관계 파악하기, 정규직과 계약직에 대한 처우의 차이 등.
'같은 일을 하는데 저 사람은 더 많은 월급을 받네.'
자동차를 만드는 대기업에서 차의 오른쪽 문을 조립하는 사람은 정규직, 왼쪽 문을 조립하는 사람은 계약직이고, 이 둘의 급여가 100만 원 이상 차이 난다는 것을 뉴스로 본 적이 있다. 물론 정규직이 더 많이 받는 쪽이다. 그 뉴스를 접했을 때는 '같은 일을 하는데 돈을 다르게 받는다고? 그런 차별이 있구나' 정도로 넘어갔었고, 다른 많은 뉴스들이 잊히듯이 그 뉴스도 잊혔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 왼쪽 문을 조립하는 사람이 되니 그 차별은 더 이상 그냥 넘겨지지 않는, 매일매일 또렷이 상기되는 어떤 것이었다. 여기에 틈만 나면 나를 깎아내리는 듯한 말을 일삼는 팀장까지, 일 외의 것들에서 자존감은 작아져갔다.
"그런 차별이 싫으면 정규직으로 들어와야죠."
계약직 행정원으로 같이 들어온 동기 중 한 명이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말했다. 정규직이어야 그 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자신이 받는 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한국사회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정말 많은 것인가.
"김민영 선생은 해외살다와서 그런가 좀.. 튀어. 한국사회에서는 튀는 게 좀 그래요, 그죠?"
"김민영 선생, 그 자리 계약직이지만 들어오려고 줄 서 있는 거 알죠?"
잘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팀장의 나에 대한 시각은 바뀌지 않았다. 팀장은 끊임없이 '해외학위가 있어도 너는 계약직이라는 걸 잊지 마'라고 말했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나의 꼬리표를 못 본 척 하기에 나는 많이 예민한 사람이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일을 잘하는 것보다,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 되어갔다. 눈치를 볼수록 위축되었고, 팀장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자존감을 잃어갔다.
1년 후 재계약 시기.
"김민영 선생, 재계약은 못하게 되었네. 내 조언을 잘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와 함께 입사했던 계약직 직원 스무 명 모두가 재계약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유일한 재계약 불가 대상이었다. 1년 동안 업무 성과가 나쁘지 않았고 큰 실수를 한 적도 없었지만 재계약 불가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한 결과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 억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해외에 살다 온 것이 문제라는 건가. 돈을 얼마나 쓰고 노력을 얼마나 했는데.'
이제 박사 과정에 진학할 것인가 새로운 회사에 입사할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에 돈은 아직 부족했지만, 모자란 돈은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시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1년 동안의 괴롭힘 때문인지, 상처받은 자존감 때문인지 마음속에서 이상한 고집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꼭 회사원으로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겠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