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을 뛰놀며 자란 브랜드 기획자의 2026 불교박람회
나는 법당을 뛰놀며 자랐다. 반들반들 윤이 나게 잘 닦여진 나무판자에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좋았고, 법당에 있는 특유의 두껍고 푹신한 방석을 몇 개 겹쳐 건방지게도 그 위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해가 진 어둑어둑한 밤, 몇 개만 켜져 있는 촛불의 영험한 빛 속에서 인자하게 미소짓고 있는 부처님 앞이 여러모로 아늑했던 기분. 덕분에 절에서 나는 향 냄새를 맡으면 아직도 치렁치렁한 공주옷을 입고 법당을 뛰어 다니던 그 시절로 금세 빠져든다. 엄마와 삼촌을 다 키워두고 출가하신 할아버지 덕분에 할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 내 할아버지는 스님이셨고, 나에게 절은 곧 집이었다.
할부지라고 부르며 자라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님이라고 할아버지를 불러야 했다. 그게 영 이상해서 끝까지 난 '스님 할아버지'라고 부르겠다 고집을 부렸던 것 같은데.. 보살님이었던 외할머니는 천도제가 있을 때나 예불이 있을 때면 시장에서 과일과 떡을 한가득 사다가 이고지고 오느라 안 그래도 아픈 무릎과 허리가 날로 망가졌다. 해야할 일은 많지만, 누굴 시켜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성정 탓에 평온한 날이 없었을 테다.
할머니의 눈썹은 언제나 내 천 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에겐 애들이 와서 법당을 뛰노는 것도, 애써 잘 차려둔 음식들을 몰래 주워 먹는 일도, 인절미 따위를 들고 다니다 여기저기 가루를 뿌려 두는 것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눈썹이 한껏 휘며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청이 폭발하는 순간이면 난 '사당동 호랑이가 나왔다'며 사촌 동생들을 끌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K-장녀였고, 그건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할머니는 맨날 화만 내"라고 말하며 괜히 절 앞 공터에서 돌멩이를 걷어 차고 있으면 스님 할아버지가 몰래 본인의 방으로 우리를 불렀다. 손주들이 오는 날에 맞춰서 준비를 해둔 것이었을까. 검정색 서랍장 안쪽엔 파스락대는 검정 비닐 봉지가 있었는데, 그 안은 언제나 미니 스니커즈와 ABC 초콜릿이 한가득이었다.
그 위치를 자각한 뒤로는 예불을 드리느라 어른들이 법당에 계실 때면 나는 하나둘씩 몰래 몰래 초콜릿을 꺼내 먹곤 했다. 청아하게 울리는 목탁 소리가 멎어들 때면 곧 어른들이 내려온다는 뜻이었으니, 몰래 몰래 과자를 먹는 중에도 목탁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몰래 과자를 빼먹는 걸 한 번도 걸린 적 없었다 자신했지만, 아마 스님은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인자한 스님 할아버지와 언제나 화가 나 있고 소리만 지르는 보살 할머니의 조화가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이었다.
부처님께 드린 은공이 빛을 발한 덕분인지 대학교마저 불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붙어 부처님의 자비 아래 학교를 다닌 20대 시절. 학교 중앙 동아리를 하면서는 부처님 오신 날 즈음 되어 열리는 연등제에도 매년 참여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시작해 종로의 조계사까지 행진. 귀여운 연등을 들고 아직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은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걸을 때면, 묘하게 취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저런 경험 탓인지 어디가서 '불교 신자입니다'라고 자신있게 얘기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종교가 있으신가요?' 누군가가 물으면 '전 불교요.'라고 답하곤 했다.
이렇듯 나름 불교와 친숙하게 지냈던 탓에 '힙하다'라는 단어가 '불교'와 붙는 요즘 세상이 너무 낯설다. 2023년부터 나름 힙한 불교가 트렌드가 되더니, 올해 정점을 찍은 느낌이다.
말로만 들었던 불교박람회를 실제로 다녀온 건 올해가 처음이었고... 입장 웨이팅만 40분에,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건지 아니면 사람에 쓸려 떠다니는지 모를 만큼 엄청난 인파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아, 왜 요즘 사람들이 불교에 이렇게 환장하는지(?) 알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불교와는 새삼 다른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신기했던 점은 10대, 20대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인데..! 금요일이라서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에 커다란 백팩을 매고,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온 친구들이 커다란 불상과 형형색색의 불화 사이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풍경은 상당히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 또한 그 인파에 섞여서 한 두 시간 가량을 쉴새없이 돌아다니며 한 개의 부스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나름 시장조사 겸 간 거라 특이한 굿즈들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생각보다 내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스님들의 강연이었다. 정신없이 왁자지껄한 부스들 옆에 마련된 강연장에서 스님들의 강연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는데 '너무 잘하려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는 문장이 내 눈길을 사로 잡음. 그리고 그 밑에는 '유능한 것을 경계하다' 라고 적혀져 있었는데, '아니 왜 유능한 걸 경계하라는 거지...? 당연히 유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반발심이 들어 한참을 서서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스님의 말씀은 이랬다. 너무 잘하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첫째, 진정한 창조를 막는다. 진정한 창의성과 직관은 비어 있음(空)에서 탄생하는데, 너무 잘하려는 마음은 새로운 영감이 들어올 틈을 없앤다.
둘째, 결과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잃게 한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삶인데, 너무 잘하려는 마음은 현재(과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래(결과)에 집착하게 만든다.
셋째, '조급함'이라는 독소를 만든다. 수행이건 예술이건 삶이건, 시간이 흐르고 공력이 쌓여서 위대한 성과를 거두는 것. 너무 잘하려는 의지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조급하게 만든다.
듣고 보니 '클라이언트가 있는데 어찌 유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나요!'하며 슬쩍 올라왔던 반발심이 쏙 들어갔다. 유능함을 경계하라는 말은 잘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잘하려는 마음에 집착하다가 정작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었으니까. 결국 그것도 내가 나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나에 집중하는 것의 문제였다.
스님의 말씀이 끝난 이후에도 왁자지껄한 부스들 사이를 누비며 굿즈도 구경하고 이것저것 집어 드느라 종아리를 부풀어 오르고 내 잔고도 실시간으로 털렸다. 그래도 충분히 즐거웠다. '행복은 습관이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을 움직이는 멘트들이 박혀진 키링이며 예쁘게 포장된 사찰음식이며, 불교가 이렇게 감각적으로 진화했다는 것도 새삼 반가웠고. 근데 솔직히 기획자 입장에선 아쉬움과 욕심도 생겼다. 이 정도 규모와 관심이라면, 내년엔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굿즈 구경도 좋고, 예쁜 불화 그림들도 좋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표면을 스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처음 절에 발을 들인 친구들이 반들반들한 마루 위에서 진짜 불교를 한꺼풀 더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가 생겼으면. 스님의 강연처럼 반발심이 생겼다가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 목탁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동시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럴 때에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 같은 것들. 힙한 불교가 트렌드로 소비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고 진한 '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층위가 하나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목탁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몰래 초콜릿을 꺼내 먹던 나처럼. 꼭 각 잡고 덤벼들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불교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게 지금이라면, 이제는 한 단계 조금 더 들어가 정말 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 프로그램들이 더 다양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드위크가 관을 3개나 빌려서 각 관별로 컨셉을 다르게 가져가는 것처럼. 이 정도 인기라면 내년에 더 욕심을 내어 아예 공간을 분리해 좀 더 딥한 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획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던 2026년 불교박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