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 노동자
서머싯 몸의 소설 *〈면도날〉*을 읽을 때, 나는 한 인물을 오래 붙잡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래리. 그는 부유한 집안의 청년이었으나,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뒤 세상의 화려함에 환멸을 느낀다.
그의 방황은 탐욕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그 뿌리는 혼란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그는 신의 침묵 앞에 서 있는 현대인의 초상처럼 보였다.
래리는 일자리를 버리고 인도로 떠난다. 영혼의 평화를 찾아, 마음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의 여정은 철학적이며, 동시에 사치스럽다.
가난이 아니라 여유에서 시작된 고뇌였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되는 인물이 있다.
미국의 부두 노동자, 에릭 호퍼.
그는 부와 교양의 세계와는 정반대의 자리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실명, 떠돌이 노동, 그리고 육체의 피로.
그는 대학 대신 부두를, 도서관 대신 노동의 현장을 학교 삼았다.
낮에는 화물을 나르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의 사유는 고상한 철학자가 아니라, 거친 손을 가진 노동자의 사유였다.
그는 ‘배고픔이 사색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연료였다’고 말한다.
호퍼는 비둘기의 짝짓기를 관찰하며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먹을 것이 없던 날에도, 새들이 서로에게 구애하는 모습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의 철학은 책상 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생존을 바라보는 눈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삶은 늘 실험장이었고, 철학은 그 실험의 기록이었다.
그가 무료직업소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글을 쓴 것은, 단지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현장이었다.
호퍼는 유명해지고도 부두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고단한 숨결 속에서만 인간의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이란 특별한 지적 행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각의 기술”이라 했다.
그의 삶을 보면, 철학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본능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나는 또 한 사람을 떠올린다.
빅터 프랭클.
그는 나치의 죽음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
가스실로 끌려가던 인간들이 왜 어떤 이는 무너지고 어떤 이는 살아남는가를 관찰했다.
그는 말한다.
“살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매일 면도를 했다.
깨끗이 면도한 얼굴은 건강하게 보여지고 스스로에게 ‘아직 인간이다’라는 증거였다.
그가 주운 유리조각 하나가, 인간 존엄의 마지막 불씨였다.
호퍼가 비둘기를 관찰하며 배고픔을 잊었다면,
프랭클은 면도를 하며 죽음 속에서도 삶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
래리의 철학은 영혼의 사치에서,
호퍼의 철학은 육체의 고단함에서,
프랭클의 철학은 죽음의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세 사람의 길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한 점으로 모인다.
철학은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견딤 속에서 태어난다.
부유한 청년이 세상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것도,
배고픈 노동자가 관찰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도,
수용소의 죄수가 유리조각으로 얼굴을 닦는 것도
모두 같은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살아남고 싶어서, 이해하고 싶어서, 인간답고 싶어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지식은 배운 사람의 것이지만, 지혜는 견딘 사람의 것이다.
호퍼는 지식을 배운 적이 없지만, 세상을 깊이 이해했다.
그의 문장은 거칠지만 투명하다.
그는 말한다.
“나는 읽는 법을 배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찰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래리는 깨달음을 위해 먼 나라로 떠났고,
호퍼는 짐을 나르며 인간을 공부했다.
프랭클은 절망의 수용소에서 ‘의미’라는 이름의 희망을 보았다.
세 사람의 길이 다르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같다.
모두 “삶을 이해하려는 인간”이다.
철학은 결코 책 속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땀과 눈물, 그리고 버티는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갈등과 무력함,
그 속에서 던지는 한 줄의 질문이 바로 철학의 씨앗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길 위의 철학자들을 생각한다.
부두 위의 호퍼, 면도날을 쥔 프랭클, 인도의 길을 걷던 래리.
그들의 발자국이 겹쳐지는 자리에,
조용히 내 그림자를 놓아 본다.
지금 내 삶이 조금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그 속에서 사유의 불꽃이 일어난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살아 있는 철학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