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
가을의 끝자락,
강화 마니산에 올랐다.제2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찬 바람 속에서도 볕은 따스했다.산길 초입엔 “선장이 직접 잡은 새우로 만든 새우젓 판매”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강화의 바람처럼 꾸밈없는 문장.그 문장 하나에 이미 이 계절의 냄새가 담겨 있었다.
조금 올라가니 낯익은 풍경들이 색다르게 다가왔다.잎은 하나도 남지 않은 커다란 나무들이, 오히려 생명의 본질을 보여주는 듯했다.그중 한 나무엔 빨간 열매가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고, 그 옆의 나무엔 잎은 없지만 봉오리가 잔뜩 달려 있었다.그 봉오리들 사이로 분홍빛 꽃이 한두 송이 피어 있었다.바로 위에는 오래된 감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었다.높고 파란 하늘 아래, 잎 한 장 없이 매달린 주황빛 감이 유난히 선명했다.햇살에 반사된 주홍빛이 교회의 십자가보다도 더 따뜻했다.그곳이 작은 시골 교회임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오픈된 마당 안으로 들어가 감나무와 하늘을 함께 찍었다.잎은 다 떨어졌지만, 나무는 여전히 열매를 품고 있었다.마치 삶의 계절을 다 지나서도 남는 게 ‘열매’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함허동천야영장을 지나면서부터 돌계단과 바위능선이 이어졌다.발 아래로는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노래했다.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을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계절의 소리를 마음에 담았다.
능선 위로 올라서자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그러나 바다와 하늘, 갯벌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황사 때문인지, 모든 것이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갯벌이 멀리 보였다. 마른 나무들이 눕혀진 듯, 2월의 얼음이 금 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바다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고요 속에 묘한 생동이 있었다.그 정적이 작은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등산로 곳곳엔 계절을 잊은 진달래가 한두 송이 피어 있었다.가을의 한가운데서 피어난 봄꽃은 시간의 틈을 건너온 존재 같았다.그 작은 꽃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제철을 모르는’ 그 진달래처럼, 나도 때로는 남들과 다른 시기에 피어나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이르니 뜻밖의 생명들이 맞아주었다.고양이들이었다.열 마리도 넘는 고양이들이 길게 누어 햇빛 샤워를 하기도 하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작은 새끼 두 마리 가까이에 어미가 등산객을 경계하고 있었다.이제 곧 겨울이 닥쳐올 텐데, 저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 지낼까 걱정이 되었다.그러면서도 매일 누군가 먹이를 주러 오겠지, 그 따뜻한 손길을 상상했다.산에도, 사람에게도,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잠시 후,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참성단에 닿았다.쌓인 돌단 위로 햇살이 흩어지고, 몇몇 사람들이 쌀과 물을 올려 기도하고 있었다.고요한 공간 속에서 바람이 천천히 돌았다.단군 신화 속 ‘하늘에 제사 지낸 산’이라는 말이 실감났다.그 곁엔 천연기념물인가 하며 자세히 보니 천연연기념물형이라 되어 있는 자작나무과 소사나무가 서 있었다. 봄,여름에 보면 더 멋있었겠구나 싶었다.
참성단 아래로 내려가는 길, 한 부자(父子)가 눈에 들어왔다.키 크고 마른 중고생쯤 된 아들이 앞서 걷고, 뒤에는 키 작은 40대 중반의 아버지가 따르고 있었다.“참성단 잠깐 올라갈까?”아버지가 묻자, 아들은 시크하게 “아니요.”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그래, 오늘은 그냥 가자. 다음에 올라가자.”그렇게 부드럽게 말을 잇고, 아들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뒤에서 아버지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우리 가족의 등산길이 떠올랐다.말없이 서로를 기다려주던 그 순간들.‘함께 오른다’는 건, 같은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돌계단을 내려오며 또다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그 소리는 산이 내게 들려주는 작별 인사 같았다.
야양장 근처에서 아빠와 산책하고 있던 대엿살로 보이는 파마를 한 귀여운 아이가 도토리를 많이 주웠다고 얘기하며 도토리를 하나 건네 받았다. 뜻밖의 순수한 마음. 나눔에 찡했다.
길 끝에는 다시 그 현수막이 있었다.‘선장이 직접 잡은 새우로 만든 새우젓.’나는 그 말이 반가워 두 통을 샀다.짭조름한 향 속에서 강화의 바람이 느껴졌다.바다와 땅, 바람과 사람이 함께 만든 맛이었다.
초지대교를 건너는 길, 해 질 무렵이었다.서해의 하늘이 붉게 물들고, 바다 위를 수많은 철새들이 낮게 스쳐 지나갔다.마치 누군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한 행렬이었다.그 순간, 마음이 환해졌다.
오늘 하루, 나는 가을과 충분히 대화했다.산이 들려준 바람의 말, 낙엽의 소리, 감나무의 빛깔이 마음속에 차곡이 쌓였다.
가을엔 산에 올라야 한다.그곳에는 하늘과 가까운 대화가 있고,잎을 다 떨구어도 열매를 품은 나무들이 있다.내려오는 길에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하늘도, 바람도, 마음도 모두 맑았다.나는 오늘, 가을에 해야 할 일을 다 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