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바라보는 관객
요코의 죽음 앞에서도 시마무라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구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은하수를 바라본다. 인간의 죽음과 우주의 아름다움이 동시에 포착된다. 이 장면은 시마무라의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아름답지만 잔혹하다. 왜냐하면 그는 끝까지 관객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시마무라는 설국을 찾지만, 설국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도쿄에서 온 손님이며,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눈 덮인 온천 마을의 고요와 고립은 그에게 삶의 조건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다. 그는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도, 이곳의 현실을 떠맡을 각오도 하지 않는다. 설국은 그에게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바라보는 풍경이다. 도시의 혼잡을 떠나 잠시 쉬는 여행지이다.
고마코와의 관계에서도 그의 태도는 일관된다. 고마코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사랑을 말하며, 몸과 삶을 내어준다. 그녀는 설국의 현실 속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시마무라는 그녀의 삶에 깊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살지 않고, 사랑을 관찰한다. 요코에 대한 태도는 더 극단적이다. 요코는 목소리로 기억되고, 투명한 시선과 고요한 분위기로 남는다. 요코는 그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대상이며, 닿을 수 없는 순수의 상징이다.
이렇듯 시마무라는 늘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그는 깊이 느끼지만,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이해하지만, 책임지지 않는다. 마치 우리 현대인들 같다. 시마무라는 ‘관조하는 근대 지식인’의 전형이다. 설국의 눈도, 고마코의 헌신도, 요코의 순수함도 모두 그의 시선 속에서 소비된다.
결말의 화재 장면에서 이 태도는 극단에 이른다. 불길 속에서 요코가 추락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순간, 시마무라는 달려가지 않는다. 그는 비극의 한복판에서도 한 발 물러선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가 바라보는 은하수는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바로 눈앞의 죽음을 덮어버린다. 이 순간, 요코의 죽음은 하나의 비극이자 동시에 하나의 완성된 장면이 된다. 그리고 그 장면을 완성시키는 시선이 바로 시마무라의 시선이다. 이 장면이 잔혹한 이유는 시마무라가 잔인해서가 아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해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끝내 관객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태도.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서서히 소모시킨다는 사실을 그는 알면서도, 혹은 알지 않으려 하면서 그대로 유지한다. 그의 무책임은 소리 없이 작동한다.
고마코는 살아남는다. 그녀는 상처 입은 채로 현실을 견디며 계속 살아가야 한다.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만이 남는다. 시마무라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이며, 여전히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주체다. 그래서 <설국>은 인간의 태도를 묻는 소설이다. 삶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깊이 들어가고
있는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시마무라는 극단적인 악인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불편하다. 시마무라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책임지지 않고, 사랑을 느끼지만 선택하지 않는다. 눈의 나라에서 모든 것은 덮이고 사라지지만, 그의 태도만은 끝내 남는다.
<설국>을 읽고 난 뒤, 나는 오래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삶의 비극 앞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참여자인가, 아니면 안전한거리에서 바라보는 관객인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p7
시마무라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 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 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뛸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p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