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감사
카톡~
그냥 마음도 뒤숭숭해서 느릿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열었다.
어? 아기동영상이 보인다.
순간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난다.
2022년 10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0년 출산율은 4.53% 였으나 2021년은 0.81% 라고 한다. 이런 저출산 시대에 딸은 겁도 없이 아이를 넷을 낳겠다고 했다. 모두가 심하다고 하니 셋으로 줄었는데 셋도 많다 하니 둘은 꼭 낳겠다고 한다. 아이들을 예뻐하니 형편만 되면 잘 키울 것 같기는 하다.
딸은 일요일부터 진통이 있다고 했다. 첫아이이니 진통이 좀 길어지겠거니 하고 월요일을 지냈다. 예정일인 화요일 새벽부터 진통이 심해져서 아침 일찍 산부인과에 가니 아직이라고 금요일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렇게 화요일도 수요일도 딸은 10분 간격으로 오는 진통으로 힘들어했다. 자궁이 열리지 않았다고 해서 진통 중인 딸을 데리고 30도의 더운 날에 천을 산책하고 아파트 19층까지 걷기를 2번씩 했다. 그리고 목요일 잦은 진통으로 병원에 가니 양수도 줄고 아기 몸무게도 줄었다고 한다. 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려면 유도분만을 권유한다. 더 기다려 보겠다는 딸을 설득하여 유도분만을 하기 위해 입원을 했다.
겁 많고 불안이 많은 딸이 일요일부터 진통을 참고 견디면서 웃으며 여유를 갖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산부인과에서는 처음부터 속골반이 작으니 제왕절개를 권유했다. 딸이 자연분만 하겠다고 고집을 했다. 힘들면 제왕절개도 괜찮다고 진통이 너무 오래되고 자궁은 전혀 열리지 않으니 유도분만을 하자 해도 딸은 꿈쩍도 안 했다.
결국 딸이 분만실로 들어가는데 보호자는 1명이어야 한다고 한다. 사위가 병원까지 오는 시간이 있으므로 사위 올 떼까지만 있는다 해도 병원 측에서는 완강했다. 결국 나는 분만실 밖에서 대기하고 딸 혼자 들어갔다. 힘들고 아프고 무서울 텐데 혼자 어쩌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죽을 것 같았던 아픔들이 내 몸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딸아 힘내라, 아가야 건강하게 만나자’ 기도하며 복도를 오갔다. 사위를 기다리는 동안 보니 산모 둘이 아기를 낳고 휠체어를 타고 남편과 함께 입원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편들이 입원실로 올라가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친정엄마가 딸을 돌보는 것도 옛날 일인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요즘은 남편들도 회사에서 출산휴가를 내고 아기 낳을 때 분만실에서부터 회복될 때까지 함께 한다고 한다. 나 몰라라 하던 옛날보다 부인의 고통과 출산의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분만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딸 손도 잡아 주지 못하고 복도에서 서성이는 내게 씁쓸함이 스며들었다.
아침 11시에 분만실에 들어가 촉진제를 맞아도 아픔만 더 해가고 자궁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혈압이 높아져 산모도 위험할 수 있어 저녁 무렵 무통주사를 맞았다. 그렇게 밤을 보내며 아침 10에는 아가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침이 되어도 전화를 할 수도 없고 궁금증만 더했다. 딸은 7시부터 죽을 것 같이 아픈데 자궁도 덜 열렸고 힘을 수십 번 3시간을 넘게 주며 죽음을 넘나들며 아기가 태어났다. 속골반이 좁아 2.45킬로 아기의 머리가 처음에는 세모였다. 시간이 지나니 그냥 아기 모습으로 돌아오고 똘망똘망 이쁘기도 하다.
벌써 자기를 알아보고 말도 하는 것 같다는 딸은 아픈 것도 잊고 벌써 허풍쟁이가 되어 있다.
안 될 것 같았는데 위대한 승리라고 간호사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축하를 해 주었다.
아기를 눈으로 보며 품에 안으며
죽을 것 같은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는 기적을 딸도 느꼈으리라.
작년 코로나 백신으로 인해
임신초기 하늘나라도 한 명을 보낸 경험이 있어
10달 조심하고 기도하고 보낸 날들이다.
일주일의 진통도 가족 모두의 염려와 기도와 희망으로
딸은 잘 견뎌 주었다.
임신축하 성별파티 드디어 아기와의 만남.
이 모든 축복에 감사하다.
딸, 할머니 만들어 줘서 고마워.
수고했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