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왜건효과
첫째는 보라색을 좋아했다.
그냥 보라색이 좋은 건지, 패티(뽀로로 캐릭터)가 보라색이라 그런지 아직 모른다. 여하튼 첫째는 보라색이면 환장했다. 옷도 보라색, 의자도 보라색, 찰흙도 보라색이어야 했다.가끔 보라만 고집하며 떼쓰면 화가 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좋았다.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는 건 고유한 매력이니까.
나는 무색무취의 공대생이었다. 똑같은 PPT 배경색깔과 비슷한 옷차림이 익숙한 공대생.
형형색색으로 꾸민 학우들을 보면 그 개성과 화려함이 부러웠다. 나만의 매력을 꽃피워보지 못한 아쉬움이 늘 마음 한켠에 있었다.
그런데 내 딸이 보라색 마니아라니.
그 흔한 분홍색도 아니고.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보라색 옷을 입고 어린이집으로 등원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볼 때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보라색을 거부했다.
이제는 핑크만 입겠다고 분홍색 옷을 사달라고 선언했다. 자초지종 들어보니 어린이집 친구들이 분홍색을 입기 시작한 게 이유였다. 곧 핑크색 치마, 드레스, 잠옷들이 첫째 옷장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분홍색 유아용 변기도 집에 도착했다.
이렇게 엄마와 할머니들은 그녀의 분홍색 열망에 부채질했다. 귀여우니까.
나는 이 광경이 안타까웠다.친구들 때문에 그 좋아했던 보라색을 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필이면 왜 분홍색인가.
그 흔하고 뻔한 핑크가 뭐가 좋다고.
분홍색만 찾았을 때 못마땅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부모가 되니 이전엔 그냥 넘어갔던 것들이 걸리기 시작하는데 그중 하나가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다.
아이에게 엄지공주를 읽어주다가 깜짝 놀랐다. 이게 내가 알던 그 착한 엄지 이야기가 맞아?
못생긴 두꺼비는 거절하고 잘생긴 왕자님이랑 결혼하는게 이야기의 골자다. 하필 엄지는 분홍색 옷을 입고 왕자님은 파란색 옷을 입고 있더라.
경각심을 갖고 살펴보니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다 비슷한 내용이다(얼마 전 이슈 됐던 흑인인어공주가 달갑진 않지만 그 취지는 깊게 공감한다)
이렇듯 핑크는 내게 천편일률적이며 뒤틀린 메시지였다. 우리 딸이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길 원했다. 성대만 받쳐줬으면 존 레전드의 True color를 불러줬을 테다. 친구들만 따라가다 보면 핑크 거짓말에 속을 수 있어. 그게 지속되면 무색무취가 돼버려.
'넌 다른 색을 좋아해야 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와 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나는 핑크 드레스를 입고 즐거워하는 딸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지 못했다.
심리학에 밴드웨건효과가 있다. 편승효과로 잘 알려진 이것은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면 이런 경향을 따르는 소비자가 늘어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패션, 소비, 정치등 모든 영역에서 쉽게 보이는 현상이다. 이것이 쉽게 일어나는 이유는 동조현상 때문인데,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부족할 경우 집단의 행동을 따르는 게 안전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은 집단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또 타인 속에 융화되기 위해 동조한다.
나 역시 자주 경험한다.
바지통을 늘린 게 기괴해 보이다가도 길거리에 사람들이 통 큰 바지를 입고 다니면 어느새 괜찮아 보이는 것(물론 나는 아직 쫄바지를 입는 유행에 뒤처진 자다), 음식점 앞 줄이 길면 맛집 같아 보이고, 스마트스토어 리뷰수가 많으면 꼭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이것 아닌가. 이 현상은 비이성적이지만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 중 하나다.
밴드웨건효과 프리즘을 쓰고 첫째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첫째가 분홍색을 입는 건 친구들과의 소속감, 또래와 융화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이건 우려해야 할게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이다. 주변을 인식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방증이니까.
아빠인 나도 아직 밴드웨건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이제 35개월 된 아이에게 트루컬러를 외치다니 웃기는 꼴이다. 딸내미의 변화를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혹시 훗날 핑크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때 고민해도 늦지않다.
아이의 행동을 쉽고 올바르게 유도하기위해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근데 심리학은 오히려 아이를 바라보는 내 관점을 변화시킨다. 재밌고 신기하다. 그래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되는거지. 늘 그렇듯이.
이제 그녀의 핑크 드레스를 다시 보니 무지개색깔인 거 같기도 하다. 뭐가 됐든 아이의 현재를 공감하고 즐기는데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겠다 다짐한다.
아 그래도 이 시기가 끝나면 다시 보라색깔을 좋아했으면 좋겠다.